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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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얘들아, 현실에 지쳤을 때 이 광야를 기억하렴!

참 빛 사랑 2021. 6. 1. 21:09

[미카엘의 순례일기] (21)학생들을 위한 특별한 순례(하)

▲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주님 무덤 성당 폐문 시간에 성당 내부를 핸드폰으로 찍고 있다.


순례 날짜는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해 2월 초순으로 정해졌습니다. 신부님은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계획을 자세히 짜놓으셨지만 현지 사정을 많이 이해해주셨고, 사장님 두 분께서도 신부님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노력하시며 순례 계획도 매끄럽게 조율했습니다.

출발 전에 갖는 설명회도 좀 더 꼼꼼하게 신경을 썼습니다. 해외여행이 처음인 아이들이 많고 직접 준비물을 챙겨야 하는 학생들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도 내내 열심히 메모를 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께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하시겠다며 마이크를 넘겨받았습니다.

“1년간 준비하느라 고생했어. 미카엘씨가 말했던 준비물들은 신부님과 선생님들이 책임질게. 너희는 마음가짐을 준비하고, 배낭 딱 하나만 메고 와. 예수님처럼 여벌 옷 없이 오면 더 좋고. 특히 사진기는 넣지 말 것. 눈으로 보고, 기억으로 남기자. 신약성경은 꼭 가져와라. 이상!”

그만 머쓱해진 저는 “옷은 없어도 되는데, 여권은 꼭 챙기세요. 일단 한국 땅은 떠나야 하니까” 하고 덧붙였고, 깔깔 웃는 아이들과 인사했습니다. 신부님과 선생님들의 설명회는 아이들이 떠난 이후에도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음은 물론입니다.

신부님의 말씀대로 정말 짐가방도 없이 배낭 하나만을 둘러메고 온 아이들의 순례는 제게도 선물과 같았습니다. 1년간 성경 공부를 해온 아이들의 질문은 저를 놀라게 할 정도였고, 저녁 식사 이후의 성경 나눔 시간은 피정만큼이나 유익했지요. 이전에 가지 않은 특별한 장소를 방문했던 것은 전혀 아닙니다. 그런데도 아이들에게 이스라엘은 제가 알던 것과는 전혀 다른 체험을 주는 듯했습니다. 가끔은 엉뚱하고, 가끔은 수도자처럼 현명한 아이들의 말을 듣다 보면 저의 긴장도 즐거움이 되어 사라지곤 했습니다.

어느 날은 다 함께 광야를 걷게 되었습니다. 광야는 생각보다 미끄러운 데다 햇볕에 갈라진 돌들 때문에 자칫 다칠 수 있습니다. 제가 주의 사항을 전달하려는 찰나, 갑자기 신부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들, 신발 벗어보자. 예수님도 아마 맨발이셨을 거야. 조심해서 다니되, 예수님을 닮아가려는 마음으로 걷자!”

결국 우리는 모두 신발과 양말을 벗어둔 채 광야를 걸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끝까지 누구 하나 발에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아마 그 걸음걸음을 천사들이 손으로 받쳐주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이스라엘 순례의 마무리는 신부님이 특별히 요청하신 예루살렘 자유 순례였습니다. 이틀간 예루살렘의 구(舊)시가지를 돌아본 아이들은 다시 가보고 싶은 장소를 직접 골랐습니다. 선생님 한 명에 6~7명의 아이들이 한 조가 되었고, 각자 지도 한 장과 10달러씩을 받아들고서 아침 9시에 흩어졌습니다. 저녁 5시에 무덤 성당에 예약된 미사 시간에 모이기 전까지는 완전한 자유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과 뒤에 남아 순례와 신앙생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하루 종일 낯선 땅에서 길잡이도 없이 걷는다는 게 쉽지는 않았을 터입니다. 선생님들 또한 고작 대학생일 뿐인데 아이들 여럿을 챙기며 다니기가 여간했을까요. 하지만 약속 시각에 누구도 늦지 않았고, 모두 기쁘고 즐거운 얼굴로 돌아왔습니다. 미사 후에는 종일 걸었던 예루살렘에 대해 한참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날 저녁, 마지막 모임에서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이제 곧 세상에 나가게 돼. 분명 수많은 어려움이 있겠지. 현실의 벽은 너희 생각보다 훨씬 높고 튼튼할 거야. 예수님을 찾을 시간이 없을 수도 있어. 어쩌면 신앙을 잃을지도 몰라. 그런 순간에, 지금 우리의 순례가 생각나면 좋겠다. 예수님이 걸었던 갈릴래아 언덕과 광야, 예루살렘의 골목들이. 언젠가 꼭 예루살렘으로 다시 와서 오늘 걸었던 길을 찾아 걸어봐. 그러면 왜 내가 어린 너희를 이곳에 데려왔는지 알게 될 거야. 약속하자! 세상을 살다가 너무나도 지치면, 이곳에 와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거야. 이번 순례는 너희들에게 그런 용기를 주기 위한 시간이었어. 처음은 어렵지만, 이미 해본 일을 다시 하는 건 쉬울 테니까.”

그제서야 저는 첫 만남부터 유달리 특이했던 신부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아이들의 상상보다 훨씬 더 길고 지난한 여정이지요. 구불구불한 어른의 길목마다 어린 시절 몸으로 체험했던 예수님의 길을 떠올릴 수 있다면 얼마나 큰 힘이 될까요? 그 아이들은 훗날, 신부님과의 약속을 꼭 지키게 될 것입니다. 어릴 적 밟았던 땅 위에서, 한때 자신을 이끌었던 바로 그 지도 한 장을 또다시 손에 쥔 채 말입니다.

“인간이 마음으로 앞길을 계획하여도 그의 발걸음을 이끄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언 16,9)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