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획특집

조선 교우들, “유럽인 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겠다” 교황께 약속

참 빛 사랑 2024. 8. 29. 17:42
 
유진길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조선 교우들이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1825년 1월 21일 보낸 편지로 책문 주막 대문에 ‘만신만복(萬信萬福)’이라 쓰고 수건을 들고 있으면 안내인들이 알아보고 브뤼기에르 주교를 조선으로 모시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페레이라 주교에게 조선 교우들 입장 밝혀

1835년 1월 저의 전권 대리자인 왕 요셉과 면담을 마친 유진길(아우구스티노)·남이관(세바스티아노)·조신철(가롤로)·김 프란치스코 등은 저에게 담배 2갑과 부채 몇 자루, 두통약 몇 개를 선물했습니다.

저의 지시를 받은 왕 요셉은 조선 교우들에게 올해(1835년) 음력 11월 저를 조선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것을 남경교구장 겸 북경교구장 서리인 피레스 페레이라 주교에게 공식적으로 밝히도록 했습니다. 조선대목구장 주교가 조선의 입국을 주저하게 만드는 모든 변명과 핑곗거리를 제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한다면 요동에 제 거처를 한 곳 마련해 주겠다고 여러 번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페레이라 주교를 예방한 유진길을 비롯한 조선 교우들은 그로부터 저를 조선으로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지 질문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예”라고 답했습니다. 이에 페레이라 주교는 “나중에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중국어로 한 이 말은 “좋은 일이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1835년 1월 21일 페레이라 주교는 조선 교우들과 면담을 마친 후 즉각 왕 요셉을 통해 제게 서신을 전했습니다. 제게 보낸 마지막 편지였습니다. 그는 편지에서 이렇게 밝히며 선을 그었습니다.

“저는 도와줄 용의가 있으나 제 능력이 미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이미 이런 일을 예견했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영육간에 거지나 마찬가지입니다. 왕 요셉이 그들과 협의했습니다. 여러 해 전부터 저는 항상 그들에게 조선 청년들이 이곳이나 혹은 마카오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그들을 내보낼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대답은 한결같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항덕 신부가 조선에 들어가면서 즉시 그 해결책의 필요성과 가능성을 깨달았습니다. 제가 주교님을 위해 동부 달단, 곧 요동에 거처를 마련하겠다고 약속했다고요! 저는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습니다. 누구도 불가능한 일을 할 의무가 없기 때문입니다. 저 유능한 움피에레스 신부가 그런 말을 했다면 다른 일에서와같이 잘못한 것입니다. 이 일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포르투갈인 미란다 신부나 카스트로 신부가 그리로 갈 시도를 했을 것입니다.

저는 경험으로 잘 압니다. 왕 요셉이 이미 두 번 갔었고 그곳의 안내인이 제게 왔다 주교님에게 갔는데 아무런 새로운 결론도 얻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이후로는 결코 한 적도 없는 저의 약속을 더는 반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신부가 약속했다면 그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주교님은 마카오 주재 파리외방전교회 대표부 신부의 의견을 듣는 것이 훨씬 더 좋을 것입니다. 그는 주교님께 소식을 듣기 전에는 결코 현지에서 떠나지 말라고 권고했습니다.”



페레이라 주교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

이 편지로 페레이라 주교가 저를 전혀 돕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약속을 잊은 모양입니다. 그는 조선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이는 것에 동의하면 요동의 교우들에게 제가 조선에 들어갈 때까지 얼마간 숨어 지낼 수 있는 은신처를 제공하도록 권유하겠노라고 제게 직접 약속했습니다. 그는 “만약 마카오 주재 포교성성 대표부 신부가 약속했다면 그가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는데, 이는 움피에레스 신부가 제게 한 약속이 결코 아닙니다. 페레이라 주교가 제게 정식으로 약속한 것입니다.

이제 조선 교우들의 열의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더는 우길 수 없게 되자, 그는 서둘러 자기가 한 약속을 부인했습니다. 그가 제시하는 이유는 조선 입국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불가능한 일을 할 의무는 없습니다”라고 하는데 어째서 그는 극복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지는 방해물을 스스로 놓았던 것일까요? 그가 거론한 연락원의 증언으로는 페레이라 주교가 요동 교우들에게 자신의 추천서를 지니고 있지 않은 그 어떤 선교사도 받아들이지 말라고 했다고 합니다.

왜 그는 저에게 자신의 소개장 써주기를 끈질기게 거절하는 것일까요? 몇몇 사람들은 제가 마카오로 돌아가 그곳에서 조선에 대한 소식을 기다리는 것이 더 신중한 처사라고 합니다. 제 의견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조선 선교지가 포르투갈 신부들의 재치권에서 벗어나게 되는 순간부터 제게 일어난 모든 일을 예상했습니다. 제가 싱가포르에 있었을 때부터 움피에레스 신부는 포르투갈인들의 도움 없이 지낼 수 있도록, 아니 오히려 그들과 멀리하도록 경계하고 대책을 마련하라고 경고했습니다.

저는 조선 교우들의 용기를 다시 한 번 북돋워 주고 격려하려고 다음과 같이 글을 썼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자신에게 이로운 것들에 대해 두 눈을 열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더없이 기쁩니다. 하느님의 보호 아래 여러분 자신을 맡기십시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여러분을 지켜주는 천사들과 성인들의 도우심을 청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내린 용감한 결의를 자신 있게 실행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에 우리 자신을 내맡겨야 하지만 또한 그 섭리를 도와드리기도 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섭리는 우리 없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선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사업을 잘 끝내시리라 확신하면서 그분의 이끄심에 전적으로 의탁하십시오. ⋯여항덕 신부에게 맡겨진 두 젊은이는 제가 입국할 때까지 조선에 남아 있었으면 합니다. 그들에게 사제품을 준비시키기에 적당한 장소를 선정하는 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그들이 제 지시 없이 조선에서 나온다면 절대로 신부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혹 요동의 교우들이 이곳에서는 아무도 조선대목구장의 거처를 제공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브뤼기에르 주교는 결코 조선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우리 주교님이 국경으로 오는데 여러분의 도움은 필요 없습니다. 그분은 여러분 없이도 얼마든지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이관 세바스티아노가 조선 교우들을 대표해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에게 쓴 편지. 남이관은 브뤼기에르 주교를 ‘은부(恩父)’라 부르며 육로로 조선에 입국하는 것은 어려우니 더 좋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적었다.

조선 교우들,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께 편지

저는 페레이라 주교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조선인 신학교를 세우기에 북경은 적당한 곳이 아닙니다. 너무 위험할 것입니다. 더구나 젊은이들을 조선에서 출국시키기에 앞서 우선 그들에 대해 잘 알아야만 합니다. 따라서 주교님께서는 이 학생들을 받아들이려고 주교님의 연락원을 국경으로 보내시는 수고를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주교님은 조선 교우들이 저를 받아들이기로 동의하기만 하면 저를 도와주시기로 저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은 주교님께서도 잘 알고 계십니다. 심지어 연락원이 돌아온 후에도 주교님께서는 제가 국경으로 가기 위해 잠시 머무를 은신처를 마련하도록 요동 교우들에게 촉구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주교님께서는 조선 교우들의 우호적인 의향을 몸소 확인하셨습니다. 그러니 저는 주교님께서 그토록 수차례 제게 하신 약속을 완수하시리라 확신합니다.” 페레이라 주교는 이 편지에 아무런 답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후로 그는 제게 더는 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1835년 2월 15일 북경에 있던 유진길을 비롯한 조선 교우들이 그레고리오 16세 교황과 저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들은 교황께 유럽인 선교사들을 조선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확고하게 약속했습니다. “브뤼기에르 주교님을 우리나라에 모시기 위해, 그러니까 입국시키기 위해 저희가 제안하는 방법은 여항덕 신부를 맞아들이기 위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방법들입니다. 이번 역시 같은 시기가 될 것입니다. 저희는 올해 음력 11월에 조선의 국경지대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보호하신다면 정녕 난관은 난관이 아닐 것이고, 위험도 위험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를 평화 가운데 불러들이시고 보호하심이 하느님께는 쉬운 일일 것입니다. ⋯이후 조선 입국을 자원하는 유럽인 선교사들이 계신다면 저희 모두는 기꺼이 그분들을 맞이하는 데 소홀히 하지 않겠습니다.”

조선 교우들이 제게 보낸 편지를 기쁘면서도 특별히 감사하는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내용은 그들이 제게 첫 번째로 보낸 편지와 거의 같았습니다. 봉황성에서 음력 11월 14일에서 24일까지 기다려달라는 것과 다른 선교사들도 같은 시기에 조선으로 입국시키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올해 저를 비롯해 모방·샤스탕 신부 모두가 조선에 입국하길 바랐습니다. 한 명은 음력 9월에, 다른 한 명은 음력 11월에, 나머지 한 명은 음력 3월에 말입니다. 그러나 저의 요청은 조선 교우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습니다. 조선 교우들은 조선에 파견된 유럽인 선교사 모두를 받아들이지만, 음력 11월에 1명씩만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리길재 선임기자 teotokos@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