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흔 넘어 짜장면을 맛본 이유
피천득의 책상 위에는 늘 엄마 사진이 놓여있었다. 흑백 사진 속의 엄마는 언제나 젊고 아름다웠다. 일곱 살에 아버지를 여의고 열 살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피천득은 엄마가 ‘나의 엄마’였다는 것은 타고난 영광이었다고 했다. 자신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엄마한테서 받은 것이고, 자신이 많은 결점을 지닌 것은 엄마를 일찍이 잃어버려 엄마의 사랑 속에서 자라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한, 자신이 새 한 마리 죽이지 않고 살아온 것은 엄마의 자애로운 마음 때문이며, 햇빛 속에 웃는 자신의 미소는 엄마한테서 배운 웃음이라고 했다. 그런 엄마는 피천득의 모든 글 속에 살아 있다.
피천득은 무척이나 순수하고 순진한 사람이었다. 몇 가지 일화가 이를 말해준다.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 성당 고해소로 들어갔다. 죄를 고해야 하는데 판공성사 표만 달랑 놓고 나왔다. 피천득을 모르는 젊은 신부가 고해실에서 뛰쳐나왔다. “할아버지 성사 표만 내고 가면 어떻게 하세요?”라고 따져 물었다. 그러자 “나는 죄가 없는데 어떡하나요?”라고 대답했다. 이에 젊은 신부가 야단을 쳤다. “사람에게는 죄를 짓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하느님께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랬더니 피천득은 이내 자신이 매우 교만했고, 죄를 성찰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또 이런 일이 있었다. 지인 한 사람이 피천득을 모시고 서울대 구내 중국 음식점에 들어갔다. 코스 요리를 주문했는데 순서에 따라 짜장면이 나왔다. 피천득은 짜장면을 보더니 잠시 주저하다가 젓가락을 댔다. 그러고는 “나 짜장면 처음 먹어 보는 거야”라고 했다. 그때가 95세였다. 지인은 그 연세까지 짜장면을 들지 않았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까닭을 물었더니 “모양이 좀 혐오스러워서 …” 라고 말을 흐렸다.
이런 일도 있었다. 여름 방학에 제자들이 가르침을 받기 위해 댁을 찾아갔다. 골목이 많은 동네라 문패를 보고 찾아야 했다. 아무리 다녀도 문패가 보이지 않았다. 날은 덥고 다리는 아프고 학생들은 짜증 났다. 그런데 어느 집 앞 나무 조각에 희미하게 ‘피천득’이라 적힌 문패가 보였다. 붓글씨로 쓴 글자였는데 오랜 세월로 많이 지워져 간신히 읽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선생님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문패 찾느라 고생했다고 하자, “나는 번쩍번쩍 빛나는 돌에 이름 석 자를 기록할 만큼 유명하지도 위대하지도 않으니까”라고 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신년 세배 때, 제자가 세배하면 스승은 책상 위에 나란히 세워 놓은 크리스마스카드 중에서 하나를 골라 주었다. 그해에 받은 카드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것을 모았다가 주는 것이었다. 또는 예쁜 양말이나 미제 초콜릿(당시는 귀한 식품)을 주기도 해서 받는 사람은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또한, 길을 걸을 때도 늘 가장자리로 걸었고, 자리를 잡아도 늘 낮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 모든 일화가 피천득이 얼마나 솔직하고, 순수하며 겸손한지를 말해준다.
만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다
피천득의 호는 금아(琴兒)이다. 거문고 ‘금(琴)’, 아이 ‘아(兒)’이다. ‘금아’는 춘원 이광수가 지어주었다. 금아의 엄마는 거문고를 잘 탔다. 춘원이 그 거문고와 아이를 결합해 ‘금아’라 지어 준 것이다. 피천득은 ‘금아’를 무척 사랑했다. 피천득은 자기 이름에 대해 ‘피가지변(皮哥之辯)’이란 글을 통해 재밌게 얘기했다. 옛날 조상이 제비를 뽑았는데 皮씨가 나왔다. 皮가 좋지만 더 좋은 성(姓)이었으면 하고 면사무소 직원에게 부탁해 다시 뽑았다. 이번에는 毛씨가 나왔다. 毛씨도 좋지만 毛(털)는 皮(피부)에 의존한다고 생각해 皮씨를 택했다고 한다. 피천득은 자신의 이름인 ‘천득(千得)’이 점잖은 것 같지 않아 다른 이름으로 바꾸려고 했다. 그러나 엄마가 부르던 이름을 도저히 고칠 수가 없었다. 원래 이름은 하늘에서 얻었다고 해서 ‘天得(천득)’인데, 호적계의 실수로 ‘天’이 ‘千’으로 바뀌었다. 이름을 풀이하는 사람의 말에 따르면 평생 부자로 살 팔자였는데 이름의 획수가 하나 적어 가난하게 산다고 했다.
피천득은 어려서부터 유교식 교육을 받았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웠는데, ‘신동(神童)’이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이십 대 중반에는 금강산 장안사에서 상월 스님에게 유마경과 법화경을 1년간 공부했다. 어떤 이는 피천득이 금강산에 계속 머물러 스님이 되었다면 고승(高僧)이 되었을 것이라 했다. 피천득은 ‘잠’이란 글에서 “목사님 설교를 들으면서 곧잘 잠을 잔다. 찬미 소리에 잠이 깨면 천당 갔다 온 것 같다”라고 했다. 이를 보면 개신교 신앙도 가졌던 것 같다.
예수회 김태관 신부는 피천득이 77세였을 때, 서강대학교 사제관에서 세례성사를 거행했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피천득은 자신이 존경했던 중세 이탈리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닮고자 ‘프란치스코’를 택한 것이었다. 그런데 세례명을 ‘프란치스코’로 정한 다른 이유도 전해진다. 수도회 ‘회칙’에 깊이 공감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고, 오래전에 제자 한 사람이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주소서’로 시작하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가 적힌 족자를 선물해 그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피천득은 교적을 서울 반포성당에 두었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영어 성경을 가죽 표지가 다 닳을 정도로 읽고 또 읽었다.
‘샘터’ 지령 400호를 기념하는 대담에서 김재순이 피천득에게 물었다. “언젠가 선생님께서는 저에게 ‘나는 죽을 때까지 종교를 못 가질 것 같아요’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선 만년에 가톨릭 신자가 되셨지요. 과연, 이 세상에 신이 있음을 믿으시는지요?” 금아가 대답했다. “확언은 할 수 없지만 신의 높은 경지나 정신은 가끔 느끼지요. 대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웅장함을 볼 때도 그런 걸 느낄 수 있고 음악 중에 최상의 음악, 이를테면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과 같은 음악을 들을 때도 신의 존재를 느낍니다.” 그러고는 가톨릭에 입문하게 된 사연도 이야기했다. “얼마 전 작고한 김태관 신부님이 제가 쓴 글 한 편을 보고 특별히 문답도 없이 저한테 세례를 줬어요. 그때 신부님이 읽었던 제 글이 ‘권력에 굴복하지 말고, 불쌍한 사람 저버리지 않게 해주소서. 일상생활에 있어서 대단치 않은 것에 근심 걱정하지 않게 해주소서’ 이런 내용이었답니다.” 피천득은 예수님에 대해서도 말했다. “예수님의 친구는 어부같이 당시 가난하고 천대받던 이들, 사회에서 소외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을 오직 사랑으로 대했지요. 얼마나 인간적인 분입니까? 저는 신적인 면보다도 예수님의 그런 인간적인 면을 사랑합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