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의 그림자
한편, 중병을 앓고 있는 조선의 두 선교사와 만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상봉한 다음 날부터 주저하지 않고 곧바로 사목 일선에 뛰어들었다. 최 신부는 전라도부터 시작해 6개월간 쉬지 않고 교우촌을 사목 방문했다. 이 기간에 그는 전라ㆍ경상ㆍ충청ㆍ경기ㆍ강원 등 5개 도를 돌며 신자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예비신자들에게 세례를 주어 입교시켰다. 그는 이 기간에 신자 3815명을 만나 2401명에게 고해성사를 줬다. 또 1764명에게 성체성사를, 어른 181명ㆍ유아 94명ㆍ보례자 316명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었다. 그리고 죽어가는 외교인 아기 455명에게 대세를 줬다.
“저는 조선에 들어온 후 한 번도 휴식을 취하지 못했습니다. 7월 한 달 동안만 같은 집에 머물러 있었을 뿐이고 언제나 방방곡곡을 돌아다녔습니다. 중국에서 서울까지 여행한 것을 빼고도 1월부터 지금까지 거의 5000리(약 2000㎞)를 걸어 다녔습니다. 저는 이처럼 긴 여행과 이 모든 고된 일을 하면서도 하느님의 은혜로 건강은 늘 좋았습니다.”(최양업 신부가 1850년 10월 1일 자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서)
최 신부는 첫 사목 방문 시기인 이때 두 차례나 큰 곤욕을 치렀다. 한 번은 외교인 가족과 사는 여교우 3명에게 성사를 주러 갔을 때였다. 마을에 들어갔다가 주민들이 최 신부를 서양 선교사로 오해하고 이장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이장은 마을의 모든 연장자를 소집해 최 신부 일행을 잡아 죽일 방도를 논의했다. 온 마을이 최 신부가 들어간 교우 집을 감시하고 있어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우리는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보호 아래로 달려들고 하느님의 뜻에 모든 것을 온전히 맡겼습니다. 외교인들의 고함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체하면서 밤새도록 저들이 쳐들어오는 것만을 대비하고,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버텼습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견이 서로 엇갈려 우리가 아침에 그 마을을 떠나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 두었습니다.”(같은 편지에서)
또 한 번은 200명이나 되는 신자들이 있는 마을에 머물 때였다.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있었는데 사흘째 되던 날 들통이 났다. 이장과 마을 주민들은 최 신부가 있는 집으로 달려와 점심때부터 밤중까지 욕설과 저주, 협박, 공갈을 퍼부었다. 주민들은 최 신부에게 “네가 어디 견딜 수 있나 보자. 너는 내일 붉은 오랏줄에 꽁꽁 묶여 도둑놈들의 감옥으로 끌려갈 것”이라고 소리치다 제풀에 지쳐 흩어졌다. “저는 공소 회장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한밤중에 일어나서 날이 새기 전에 그곳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 전날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 준비를 한 이들이 미사를 간절히 기대했는데도 저는 미사도 드리지 못하고 도망쳤습니다. 성사를 받지 못한 다른 신자들은 다음 날 저를 뒤좇아 100리(40㎞)나 되는 험준한 길에도 불구하고 다른 교우촌까지 와서 성사를 받았습니다.”(같은 편지에서)
이렇게 박해와 죽음의 위협은 벗처럼 늘 최양업 신부를 따라다녔다. 그는 수난과 죽음의 올가미에서 벗어날 때마다 안도하지 않고, 그 와중에도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 수 있도록 이끌어주신 하느님의 자비에 마음과 정성을 모아 감사를 드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