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회령성당이 불탄 뒤 2년쯤 지났을 무렵, 어머니는 아버지와 함께 자녀들을 데리고 청진으로 갔다. 그리고는 청진성당에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다. 당시 청진성당은 성당이라고 할 수도 없을 만큼 추레했다. 원래도 흙벽돌에 바깥에 시멘트를, 안쪽에 석회를 바르고 석면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임시 성당이었는데, 1945년 11월 소련군이 청진성당 건물에서 지내면서 폐허로 만들어 버린 걸 임시로 복구해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교우라고 해봤자 겨우 200명 남짓했던 것으로 할머니는 기억했다.
청진에 와서 중학교에 다니게 된 김 할머니는 성당에 가지 못하게 하는 아이들과 옥신각신했던 실랑이를 기억했다. 성당 가는 골목길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아이들이 “어느 학교 몇 학년이냐?”고 묻고 이름을 적어 갔다. 그래서 수업시간에 교사가 질문하라고 하자 할머니는 “제가 성당에 가는데 못 가게 막느냐?”고 물었고, 이 말에 머뭇거리던 교사가 “‘신앙의 자유도 있고, 성당에 다니지 못하게 말릴 자유도 있다’고 답변하는 걸 들으며 어처구니없어 한 적도 있다”고 기억했다. 하지만 이 정도 탄압은 시작에 불과했다. 1945년 마르코 바잉거 신부가 병사하면서 청진본당에 제2대 주임으로 부임한 이재철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체포돼 그해 10월 초순께(9일로 추정) 청진항만 등대에서 80여 명의 종교인이 총살될 때 같이 순교했고 시신은 바다에 내던져져 수습하지도 못했다.
전쟁 당시 부모를 잃은 김 할머니는 청진의과대학에 다니다가 중퇴하고 교사가 된 언니 도움으로 살다가 언니마저 결핵으로 타계하자 청진여중을 나와 야간대학에 다니던 중 대학을 중퇴한 뒤 교사가 돼 동생들을 부양했다.
“소학교를 거쳐 평양 제1고급중학교에서 음악 교사로 힘겹게 살았지만, 늘 추적당한다는 불안에 빠져 살았어요. 신앙 때문이었지요. 한 번은 ‘아~ 목동들의~ 피리 소리…’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부르주아같이 왜 그런 노래를 부르냐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러던 중 동생들이 살던 청진에 갔다가 어떤 분한테 중국에 조선족 동생이 있는데 만나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았어요. 혼기도 꽉 찼던 터라 ‘가겠다’고 말하고 청진에서 남양을 거쳐 도문, 연변을 지나 네이멍구까지 가서 결혼한 뒤 30년 넘게 살았어요. 그때 중매했던 분이 시누이에요. 탈북 도중에 연변성당에 갔는데, 거의 13년 만에 미사를 봉헌하면서 얼마나 감격했는지, 지금도 그때를 잊지 못해요. 조선에서 열차를 타고 나왔는데, 도문에 들어서니 열차 분위기가 완전히 다른 거예요. 마음대로 말하는 걸 들으며 자유를 느꼈어요. 그게 1963년 무렵입니다. 제가 북에서 나온 뒤 훗날 제 가족들에게 공안이 찾아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계속 감시를 받았던 것이지요.”

결혼을 빙자한 탈북은 김 할머니에게 도전이었다. ‘모든 걸 하느님께 맡기고 떠난’ 여정이었다. 그랬기에 탈북이 성공한 것은 “하느님 은총이었다”고 할머니는 고백한다. 중국에 사는 동안 할머니는 남편 김진호(야고보)씨와의 사이에 영택ㆍ영철(베네딕토), 아란(모니카)씨 등 2남 1녀를 뒀다.
자녀들이 성장한 뒤 한국에 온 할머니는 중국에서 만났던 이용훈 주교(수원교구장, 당시 수원가톨릭대 교수 신부) 도움으로 첫 한국어 미사를 봉헌하는 기쁨을 누린다.
“한국말로 미사를 드리게 된 건 연변에서 미사를 봉헌한 뒤 30년 만이었어요.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요즘도 1시간씩 걸려 매일 미사를 다닙니다. 하느님을 믿을 수 있는 자유,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리세요. 하느님을 흠숭하고 찬미하며 살아가는 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김 할머니는 요즘 남북의 평화통일을 위해 날마다 기도를 보탠다. “기도는 힘이 있다”고 믿는 김 할머니는 북녘 형제들이 하느님을 자유롭게 찬미할 그 날이, 북녘땅에서 자유롭게 전교할 그 날이, 통일의 그 날이 어서 오기를 기다린다.
헤어지는 문가에서 김 할머니는 취재진에 거듭 당부한다. “우리,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로 연대합시다. 좌절하지 말고.”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