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 신부 : 차 신부님을 생각하면 빈에 있는 북한 식당에 간 것이 늘 기억나요. 오스트리아는 중립국이라 북한과 수교가 있었고 북한 식당도 시내에 있었지요. 사실 당시에는 외국에 나가려면 꼭 장충단 공원 위쪽에 있는 반공센터에서 관련 교육을 이수했잖아요? 그 강의 때 북한 사람이 운영하는 식당은 절대 가지 말라는 분위기로 이야기하죠. 자칫해서 안기부(지금 국정원)에서 알게 되면 처벌받는다고 엄포도 줬고요.
차 신부 : 그런데 제가 아마 다른 한국 학생들에게도 북한 식당에 한번 가보자고 했더니 허 신부님도 구미가 당기는 듯 “한번 가보죠, 뭐” 하셨어요.
허 신부 : 우리가 북한 식당에 들어갔을 때 다른 사람들은 거의 없었죠. 상당히 깨끗하고 큰 식당인데 선입견 때문인지 으스스했지요.(웃음) 젊은 남자 종업원이 와서 독일어로 “뭐 주문하십니까?” 했을 때 차 신부님이 호기롭게 “같은 한국 사람인데 한국말로 하시지요?” 했어요.
차 신부 : 전 그건 기억나지 않고 그 종업원이 아주 유창하게 독일어를 했던 것이 기억나요.
허 신부 : 그럼 그때 사실 독일어를 잘 못 알아들어서 그랬던 건가요? 우리가 음식을 시키고 그 종업원이 커튼 친 주방 쪽으로 가서는 모습을 한참 안 보였어요. 우리는 유난히 조용한 주위를 돌아보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지요. 그러자 한 신학생이 그랬던 것 같아요. “우리 이러다 납치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차 신부님의 말에 모두 웃음이 터졌지요.
차 신부 : “이 사람들이 바봅니까? 우릴 데려다 어디다 써요. 정보도 없고 차비랑 밥값만 들어가지요!”(웃음)
허 신부 : 그날 처음 북한 식당에 가서 식사했을 때 아주 맛있었고 나중에는 그 종업원도 우리에게 경계를 풀고 잘해주셨던 것 같아요.
차 신부 : 저는 사실 빈에 있으면서 그다음에도 그곳에 여러 번 갔었어요.(웃음)
허 신부 : 내가 차 신부님 신학교 숙소에 갔을 때 눈에 먼저 보인 것이 구석에 두었던 밥솥이었어요. “이 밥솥에 직접 식사도 지으세요?” 하니까 현미밥을 하루에 한 번은 지어먹는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책꽂이에도 보니까 조금 과장해서 독일어 서적보다 한국에서 가져온 건강에 관한 서적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이것저것 물어보면 전문가 이상으로 설명을 잘해주시고, 건강을 유지하는 법을 열강(?)하곤 했어요.
차 신부 : 건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면 다른 사람들 반응은 시큰둥하죠.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사람들은 다 건강하고 아픈 적이 드물었으니까요. 아파본 사람이 다른 사람의 아픔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겠죠.
허 신부 : 사실 그때 신부님 방 구석에 작은 밥솥을 보고 눈물이 나오는 것을 많이 참고 일부러 웃기는 이야기를 많이 했죠. 동병상련(同病相憐)이라고 하잖아요. 신부님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다 알고 느낄 수 있었어요.
차 신부 : 신부님에게 특히 고마운 건 빈에 오면 우리를 한국 식당에 데려가 밥을 사준 거예요. 제가 나중에도 사람들에게 그랬죠. 살면서 제일 고마운 건 배고플 때 밥을 사주는 사람이라고요. 저희가 굶지는 않았지만 사실 비싼 한국 식당에 가서 한식을 마음대로 먹을 순 없었을 때니까요. 그리고 신부님이 빈을 떠날 때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빈 역에 배웅했는데 항상 흰 봉투를 내 주머니에 찔러주었어요. 처음에는 ‘같은 유학생끼리 힘들 텐데’ 싶어서 안 받으려 했는데 “나중에 다른 후배에게 갚아요”하는 신부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다음부터는 당당하게(?) 받았어요.(웃음)
허 신부 : 어릴 때부터 간이 안 좋았다는 신부님의 외국 유학 생활은 다른 분들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을 거로 생각했어요, 신부님 말대로 매일 기도하지 않으면 못 버틴다고 하셨죠. 늘 한결같이 옆집 아저씨 같은 느릿느릿한 말투나 몸짓과 함께 특별한 유머 감각이 있어서 어려움을 잘 견디셨을 거예요. 신부님 말대로 한국에서 매일 밤새워 기도해주는 어머니의 기도 원조가 가장 큰 힘이라 하셨죠.
<계속>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