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좌초된 함대
나름 정예 함대이지만 낡은 전함에 군기가 빠진 수병으로 구성된 프랑스 함대는 북동 계절풍이 불기 전인 8월 말 마카오 귀항을 계획하고 조선을 향했다. 항해는 순조로웠다. 프랑스 함대는 대만을 거쳐 8월 9일 오전 제주도 해상을 지나 오후에 소흑산도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 날인 10일 고군산도 인근에서 좌초했다.
“우리는 남동풍을 타고 군도 안으로 들어섰는데 수 마일 내에서만 섬이 보일 정도로 흐리고 안개 낀 날씨였다. 함선 모두 수심을 측량했고, 빅토리외즈호는 10마일 앞에서 수심을 신호로 보내왔다. 지도상에는 섬들이 북북동에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표시돼 있었지만 실제로는 남남동쪽으로 내리뻗어 있었다. …우리가 앞에 있는 작은 섬들과 직각을 이루고 있을 때 바람이 거세져 모함(글로와르호)의 돛 2개가 찢어졌다. 예비 돛을 다는 작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개펄에 좌초됐다. 북동쪽으로 약 3마일 떨어져 있던 빅토리외즈호도 거의 동시에 좌초됐다. 바람도 거세고, 해류도 빠르며. 파고도 높아 닻 한 길이만큼이라도 나아갈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보트가 견인해 함선을 개펄에서 끌어내려 시도했으나 두 차례 모두 굵은 밧줄이 끊어져 헛수고가 됐다. 세 번째 시도하려 했으나 밤이 돼 작업할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수병 2명이 익사했다.…썰물 때가 되자 함선들은 완전히 펄 위에 있었다. 배 안에는 물이 너무 차서 전복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나는 12일 아침 병사들에게 하선 명령을 내렸다.”(라 피에르 소령이 1847년 8월 19일 쓴 보고서 중에서)
1847년 8월 12일 아침에 시작한 하선 작업은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수병들의 숙영지는 ‘북쪽 또는 북서쪽 2마일(약 3.2㎞) 지점에 있는 섬’이었다. 하역 중대가 구성돼 가장 먼저 대포를 비롯한 무기류와 탄약 그리고 환자와 어린 수병들이 섬으로 옮겨졌다. 초병들이 수량이 많은 물줄기를 찾아내자 다음으로 식량과 남은 인원들 모두가 상륙했다. 좌초 과정에서 수병 2명이 익사했지만, 최양업 부제와 메스트르 신부를 비롯한 나머지 560명이 무사했다. 이들은 좌초한 배의 돛과 돛대로 천막을 짓고 숙영했다.
조선 수병들이 이 과정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고군산진 요망감관((瞭望監官-관측병) 윤승규는 프랑스 함대의 좌초 사실을 유진장(留陣將) 무관 조경순에게 즉각 보고했고, 조경순은 다시 전라 감사 홍희석에게 알렸다. 그런 후 즉각 군사를 이끌고 함께 배를 타고 좌초된 함선을 조사했다. 그리고 프랑스 해군의 숙영지를 주시했다.
전라 감사 홍희석은 바로 헌종에게 장계를 올렸으나 프랑스 함대가 좌초된 지 9일이 지난 8월 18일에서야 처음으로 이 사실이 조정에 보고됐다. 홍희석의 장계에는 “부안 화도(현 부안군 계화리) 뒤바다의 만경현 신치도 무영구미 풀 두렁(개펄의 해초 언덕)에 프랑스 함대가 닿았고, 두 함선이 좌초한 신치 풀 두렁에서 10리쯤 되는 신치산 아래 남쪽 기슭에 혹은 신치산 아래 모래사장에 프랑스 해군이 상륙해 야영하고 있다”고 적혀 있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에 띄운 서신
라 피에르 함장은 8월 13일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는 조선 수군에게 서한을 통해 “1846년 세실 제독이 조선 조정에 보낸 편지의 답을 받기 바란다”는 뜻을 전달하고, 식량과 배를 제공해 달라고 부탁했다. 전라 감사는 이 요청을 다시 조정에 보고한 후 물과 식량, 배 등 필요한 물품을 프랑스 숙영지에 공급했다. 또 만경 현령, 부안 겸 고부 군수, 위도 첨사, 여산 부사, 익산 군수 등을 차사원(差使員, 관찰사가 중요한 임무를 지어 파견하는 관원)과 문정관(問情官, 외국 배가 들어오면 그 사정을 알아보는 임시 관리)으로 임명해 동정을 살피도록 하고, 우수사와 연해 각 읍과 진에 관문을 보내 경계토록 했다.
조정은 라 피에르 함장에게 “프랑스 선교사를 살해한 것은 그들이 표류인이 아니라 잠입자였기 때문에 정당하다. 우리는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으나 설사 그들이 프랑스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처벌했을 것”이라는 내용의 회문(回文)을 보냈다. 조선 조정이 서양 함선과 처음으로 주고받은 외교 문서였다.
최양업 부제는 이 역사적인 사건에 직접 관여했을 것이다. 통역사였던 최 부제는 라 피에르 함장이 조선 조정에 보낸 한문 서한을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안타깝게도 라 피에르 함장은 조선 조정의 답을 전달받지 못했다. 조정의 회문이 신치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프랑스 군인들은 철수하고 없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