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원 입국 시도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는 조선에 입국한 페레올 주교의 지시로 두만강을 통한 조선 입국을 시도하러 1846년 1월 말께 중국인 길 안내인 2명과 함께 김대건 부제가 다녀온 길을 따라 만주 훈춘으로 떠났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17일 동안 산과 골짜기를 지나 두만강 얼음을 타고 만주 벌판을 걷고 나서 조선 국경에서 4㎞ 떨어진 두만강 인근 국경 마을인 훈춘에 도착했다. 여행길은 김대건이 그랬던 것처럼 맹수들의 습격을 막기 위해 많은 이들이 함께 뭉쳐서 이동했다. 사실 북관 개시 무역은 함경도뿐 아니라 청나라 만주의 경제를 활성화했다. 청나라 사람들은 경원, 회령 등 북관 개시에서 조선의 소와 농기구를 사들여 농사를 지었고, 해삼은 길림에서 고가로 팔렸다. 영고탑, 오라 등 흑룡강성 지역에서는 조선 한지가 겨울철 방한 창호지로 인기가 있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 말과 비단, 가죽옷이 인기를 끌었다. 청나라 말 1필이 조선소 2마리 값으로 거래됐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김대건이 한 달 걸린 여정을 거의 절반으로 단축했다. 최 부제 일행은 두만강 건너 조선 땅 경원에서 교역장인 개시가 열리기까지 열흘을 기다려야 했다. 경원 개시는 2년에 한 번 20일간 열렸다. 한 곳에 머무는 만큼 노출되기 쉽다. 특히 서양인인 메스트르 신부에겐 치명적이었다. 훈춘은 국경 도시이지만 작은 마을이었다. 서양인이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고 은신해 있기에는 눈이 너무 많았다.
1846년 2월 말 또는 3월 초 경원 개시가 열리기 전날 (참고로 신학생 김대건이 조선 신자와 접촉한 경원 개시는 1844년 3월 8일에 열렸다) 최양업 부제 일행은 경원으로 떠날 채비를 했다. 아마도 이들은 허리띠에 작은 붉은색 차주머니를 차고 흰 손수건을 챙겼을 것이다. 이러한 행색은 2년 전 신학생 김대건이 조선 신자들과 만나는 접선 신호였다.
채비를 마칠 즈음 청나라 장교 4명이 들이닥쳤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포박된 채 국경 수비대로 끌려갔다. 서양인이 잡혔다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고, 수비대 영내는 구경꾼들로 꽉 찼다. 구경꾼 중 어떤 이는 메스트르 신부의 모자를 벗기고, 어떤 이는 그의 수염을 잡아당기기도 했다. 또 어떤 이들은 중국말로 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기도 했다. 메스트르 신부는 이렇게 3시간 동안 무례한 구경꾼들에게 시달려야 했다.
“나는 침착하게 그들을 바라보며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습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구세주께서는 수난 전날에 훨씬 더한 학대를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제자가 스승보다 낫지 못하니 스승처럼 대우받는 것을 기뻐해야 합니다. 자정께 되어서야 호기심이 휴식의 필요에 졌습니다. 저는 (최양업) 토마스와 두 안내인과 함께 흙담으로 둘러친 감방으로 끌려갔습니다.”(메스트르 신부가 1846년 3월 3일 몽고에서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 날 아침부터 구경꾼들이 더 몰려들었다. 메스트르 신부는 군중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얼마 동안 감옥에서 나와 수비대 마당을 거닐어야만 했다. 아침 10시가 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관청으로 끌려가 심문을 받았다. 관장은 메스트르 신부에게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왜 왔는지를 물었다. 차례대로 관장 앞에 끌려간 최양업과 두 명의 중국인 신자도 심문을 받았다. 메스트르 신부는 자신은 천주교 사제이며, 서양에서 중국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게 하려고 왔다고 밝혔다. 관장은 신부는 “이 보잘것없는 읍내는 그대의 가르침을 받을 곳이 못 되니, 중국의 큰 지방으로 가라”고 일렀고, 메스트르 신부는 “참 하느님을 알지 않아도 될 만큼 작은 곳은 없다”고 항변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 일행은 감옥에서 하루를 더 보내고 이튿날 석방돼 장교 2명의 호위를 받으며 하루 반나절 거리에까지 끌려간 뒤 풀려났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 일행이 군인들에게 체포된 후에도 별 탈 없이 풀려나게 된 것은 프랑스와 청나라가 1844년 10월 24일 맺은 황포조약 때문이었다. 이 조약으로 아직 선교의 자유는 허용되지 않았으나 선교사들이 여행 허가증을 갖고 중국 땅을 다닐 수 있었다.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신부 일행은 이렇게 두만강 건너 경원 개시를 통해 조선에 입국하려는 계획을 실패하고 다시 소팔가자로 돌아와야만 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