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복 입고 조선 땅 밟은 선교사들
18세기 중엽에 제작된 「비변사인방안지도」중 ‘은진지도’를 보면 강경은 은진 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너른 들판 가운데 강경산(오늘날 옥녀봉으로 부름)이 있고, 그 좌우로 천이 흐르며, 뒤로는 금강이 바다와 닿아 있다. 강경천에는 조선 영조 때 만든 충청도와 전라도를 잇는 미내(渼奈)다리가 있고, 그 인근에 황산 동네가 있었다. 망성면 화산리의 화산 끝 나바위 아래에는 나암창이 있었는데 1872년 이후 ‘황산창’으로 불렸다.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는 “나암창을 황산창으로 개칭한 이유는 이곳이 황산포에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전주교회사」 1권 453쪽 참조)
문제는 1845년 당시 강경 황산은 전라도 여산도호부 북일면 황산리에, 나바위는 여산도호부 북일면 나암리에 속했고, 두 곳은 직선거리로 약 2㎞ 떨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 일행이 입국한 강경 포구에서 약간 떨어진 외딴곳을 ‘강경 황산 나루 인근’ 또는 ‘황산포 화산 나바위 인근’으로 추정해 왔다. 최근에는 이 의견들을 수렴해 한국교회사연구소가 펴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서한」 44쪽에는 이곳을 “충남 강경 부근의 황산포 나바위 도착”으로, 수원교구가 펴낸 역사총서 3권 「페레올 주교 서한」 343쪽 주 184에도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신부 일행이 도착한 곳은 강경 황산포 근처의 나바위(현재 전북 익산시 망상면 화산리)였다”라고 명기하고 있다. 한편, 김대건 신부 일행이 강경 도착 후 라파엘호에 관한 언급은 더는 없다. 아마도 발각되지 않기 위해 배에 구멍을 내어 가라앉혔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 일행은 이후 강경 신자 집에 머문다. 하선은 은밀하게 진행됐다. 은진에 사는 신자 2명이 라파엘호에 몰래 접근했다. 그들은 피부색이 다른 선교사들을 위장시키기 위해 상복과 방갓, 미투리 등을 준비해 왔다.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는 상복으로 갈아입고 두 사람의 등에 업혀 순교자들의 땅에 내렸다.
“우리는 야음을 틈타서 앞장서서 가는 신자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그 집은 흙으로 지어진 초라한 초가였습니다. 방이 두 칸 있었고, 높이가 약 3피에(약 96㎝)인 문이 있는데 이 문은 창문 역할도 합니다.…너그러운 그 집 주인은 우리에게 숙소를 내주려고 사람을 시켜서 병을 앓고 있는 아내를 다른 곳으로 옮겼습니다.”(페레올 주교의 앞의 편지에서)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