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하느님,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2018년 4월 9일, 며칠 전 두 번째 항암 치료를 끝내고 호중구 수치가 떨어져 역 격리 음압병실로 자리를 옮겼다. 아내에게 23번째 맞는 결혼기념일이다. 나는 깜짝 선물로 용돈을 모은 현금 100만 원과 부드러운 목도리, 양말 그리고 딸은 따뜻한 털실 외투 그리고 USB 칫솔 살균기, 장갑 등을 선물로 준비하였다. 나는 전날 잠시 외출하여 집에서 손수 쇠고기 미역국을 끓여와 병원 식당에 살균하여 아침 식사에 내어놓았다. 아내를 위해 몰래 준비한 이벤트로 그동안 한평생을 함께하며 무던하게 살아온 아내를 위한 고마움을 기리는 증표로 만들었다. 아내는 선물이 뭔가 하고 개봉할 때, “억!” 하는 먹먹하고 깜짝 놀라 가슴을 잠시라도 따뜻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내는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며 “에고 이것을 언제 다 준비했어 힘들었겠다~ 우리 신랑, 딸~ 사랑해. 너무너무 행복하고 고마워~ 내가 내년에는 맛있는 요리해 줄게, 꼭 약속할 게~”라며 미역국 한 사발에 밥 한 공기를 말아서 맛있게 먹는 것을 보니까 딸도 나도 마음이 울컥했다.
아내와 나는 25년 전 회사에서 만나 2년 반 사귀며 사내 결혼을 했다. 벌써 10년이란 시간이 두 번 넘어가 흐른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며 누구보다도 가장 가까운 사이로 23년 넘게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매년 내년에는 아내의 생일을 더 풍족하게 행복하게 해주어야지 하는 다짐에 다짐을 했지만 매년 지켜지지 않았다. 그래서 올해는 아내에게 특별한 결혼기념일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평소에도 사랑이 꿀처럼 넘쳐난다는 말을 자주 들었기에 너무 지나치면 생활비 걱정할까 봐 일부러 준비하지 않고 있는 척하였고, 매년 먼저 꼼꼼하게 맛난 음식과 선물을 딸과 함께 가정 살림을 꾸리며 먼저 준비하였던 사랑이 넘치는 아내였다.
7년 전의 일이다. 인천에서 서울 여의도 증권투자자문사로 아침 일찍 출근하러 광역버스를 기다리고 있던 나에게 갑자기 자동차가 후진했다. 무보험 자동차에 하반신이 깔리고 무릎 십자인대가 끊어져 긴급 수술과 재활치료로 6개월을 병원에 입원한 나를 지극 정성으로 간호하였던 아내. 그렇게 치료하며 퇴원 후 다니던 회사가 1년 후 다른 회사와 합병이 되면서 본부장 자리를 내놓고 강제 퇴사하게 되면서 급여와 퇴직금은 체불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대표이사까지 억대 주가조작사건에 휘말리며 증권사는 폐업되었고 6개월간 급여 또한 받지 못하며 아내에게 매일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하였다. 또한, 얼마 지나지 않아 삼십 년 지기 친구에게 우연히 보증을 서준 것이 친구 회사가 부도나면서 친구는 해외 도피하고 일부 2억이 넘는 부채는 눈덩이처럼 매일 불어 나에게 넘어왔다. 급기야 서울 예술중학교에 영재로 다니던 딸마저 부채로 학비를 감당치 못하여 거주지 일반중학교 옮기게 되었고 딸은 음악을 더 이상 이어가기 힘들 정도로 되었다.
매일 불어나는 부채를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유일한 부동산이었던 빌라를 아내와 딸의 동의를 얻어 매매하고 부채를 갚았으나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되었고 조금 남은 돈으로 지하 단칸방으로 세 식구가 옮겨야 했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고 버티기 힘들어 “하느님, 어디에 계시나이까? 하느님, 저희를 버리시나이까?”라며 매일 하느님을 부르고 아내와 손을 붙잡고 울며 하느님을 찾고 조금의 희망을 찾아보았지만, 아침도 저녁도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가족 모두 자살을 생각했던 어느 날, 자살을 마음먹던 그 날 “정말 딱, 한 번만 살고자 버텨보자”며 마지막 삶의 희망으로 선택한 개인파산 및 면책을 난생처음 법원에 신청하고 빛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피를 말리며 기다렸다. 그 후 1년 6개월의 시간이 지나고 법원으로부터 파산 결정과 면책 결정 함께 받던 날, 우리 세 식구가 펑펑 울며 이제 모든 부채에서 벗어나던 날, 언제나 함께 한 우리 한 가족 세 식구였다.
그날 이후 3년을 열심히 일해 아파트로 이사했다. 정말 앞이 보이지 않고 힘겨워 허리 한 번 펴기 힘든 하루 일상에 비할 수는 없어도 아내는 “우리 신랑, 우리 아빠의 사랑이 최고!”라며 한 식구의 가장과 남편의 기를 살려줬다. 이 세상 하나밖에 없던 아내에게 금전적이고 물질적이긴 하지만, 나의 사랑과 정성이 듬뿍 담긴 쇠고기 미역국으로 아내에 대한 사랑의 절실함과 본심을 알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꼭 전해야겠다고 마음먹고 준비한 오늘이었다.
평생 마지막까지 함께하자고 약속하던 23년 전 1995년 4월 9일 몇백 년 만에 길일이라는 뉴스에 아내와 나도 한 주인공이 되던 그 날 결혼을 하고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갔다. 신혼여행은 3박 4일 서귀포 KAL호텔에 여장을 풀고 가까운 시장에 가서 신선한 해산물과 회도 먹고 밤에는 사랑을 나누며 부픈 단꿈을 꾸며 백년해로하자고 서로 깍지 끼우며 한날한시에 마지막도 함께 하자며 약속하던 4월 9일이었다. 또한, 일 년에 한두 번씩 여행을 가자고 약속하였지만, 세상과 삶의 생활이 여행 한 번 가는 것도 시간을 낼 수 없을 만큼 살아가는 시간에 로봇이 되어 회전목마 돌 듯 앞날 이 과거와 반복되어 여유 있고 즐거운 여행 한 번 가지 못한 지난날이 아내에게 미안하고 또 미안하고 고맙고, 매일 매일을 아끼고 사랑했다. 아는 항상 어떠한 내색조차 안 하고 부부간에 정과 가족에게 사랑과 행복을 긍정과 함께 베풀면서 함께 살아온 내 사랑의 여행 그 자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즐비하게 나열되었던 군상의 일들이 마무리되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가족의 삶의 시간 설계 속에 차질이 생긴 것은 느닷없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시간 여유는 조금씩 쌓아가고 있었다. 아내와 꿈꿨던 시간의 기억도 되살리며 주체할 수 없는 시간의 행복도 해결사가 될 수 있는 곳에서 두려움을 없애며 우리의 마지막 시간 여행을 준비하는 것 같았다. 아니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점점 다가오는 시간이 더해갈 때마다 잠도 오지 않았다. 아내와 23번째 기념일을 마친 후 아내의 3번째 항암치료가 있기 전 임시 퇴원을 하여 집에서의 꿈같던 일주일 심리적 안정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이 시간의 줄다리기가 고속도로가 되었으면 하였다. 달리는 시간의 빠른 속도가 나의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듯했다. 지금의 이 시간이 우주상에 지구에 하나의 점을 찍고 있다는 것조차 거추장스럽고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의 눈물이 줄지어 흘러도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생각이 바뀌면 시간도 바뀔 것이라 믿고 “주님을 찾고 또 찾으며 아내가 완쾌되기를 기도드렸다.” 밤이 오면 낮이 오고, 시간도 달라지고 결과도 좋아지리라 생각하며 하루하루 집에서 아내와 보내며 행복의 기록을 만들어 갔다.
일주일이 벌써 지나갔고 3차 항암치료를 위해 다시 대학병원에 입원하였다. 3차 항암은 1차, 2차보다 5배 이상 고통이 다가왔고 그 결과 주치의로부터 “암세포가 혈액 속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하며 기쁨의 눈물을 눈에 가득 채우고 갈망했던 행복과 자유를 얻어 놓고 고통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필리 4,6)라는 말이 들려왔다. 기나긴 어두운 터널과 고통과 우울의 시간을 달고 살아야 했던 시간도 이제 행복으로 바뀌어 시작된 것 같았다. 그러던 6월 16일, 이제 꿈같이 여기던 퇴원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던 그 날 아내가 수액을 많이 맞았는지 “배가 빵빵하다”고 하면서 소변이 잘 나오지 않고 불편하다고 고통을 호소하였다. 간호사와 의료진들은 잠시만 기다리는 말뿐 조처를 하지 않더니 자꾸 고통을 호소하는 것에 인상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잠시 20분이 지났을까 3병동 간호사 한 명이 오더니, 투약 약물을 말하지 않고 아내가 맞고 있는 수액에 직접 투여하였다. 그 간호사가 ‘아티반’이란 약물을 주사한 이후 아내는 갑자기 정신을 잃고 헛소리를 하며 온몸을 가누지 못하였다. 긴급하게 병동 간호사와 주치의를 호출하였고 아내의 상황에 대해 빨리 조치를 하라고 알렸으나 병동 간호사와 주치의는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긴급조치도 취하지 않고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이날 투약한 약물로 아내는 그 이후로 정신을 제대로 차리지 못하였고 이 투약한 약물에 대한 아내의 긴급 조치와 치료를 계속 요구하였으나 주치의와 간호사는 조치할 생각조차 없었다. 그 다음 날 대학병원 주치의에게 이상한 약물을 투약한 책임을 묻겠다고 알렸고 그다음부터 병원 의료진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는 아내에게 고농도 30배 되는 산소 호흡기를 아내에게 강제로 부착하고 투여하였다. 그날로부터 3일 만에 사랑하는 아내는 의료사고로 하늘로 올라갔다. 대학병원 의료진의 투약할 수 없는 약물 투여로 3일 만에 갑자기 내 삶의 전부이고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내를 하늘로 먼저 보낸 이후 나의 시간은 제자리에 멈춰져 있었고 하루하루의 시간은 암흑이 되어버렸다.
하느님을 원망하였고 또 원망하였다. 세상이 너무 두렵고 막막하였고 아내와 함께했던 삶이 한순간 무너졌고 분노와 화는 우주를 뚫어버릴 만큼 폭발했다. 대학병원은 사과 한마디 없었고 주치의와 해당 관련 의료진과 간호사들을 당일 해외로 몰래 도피시키며 중요 의료기록 발급도 이런저런 이유로 발급도 차일피일 미루기에 바빴다. 너무 분하지만 억울하며 아내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아내의 장례를 마쳤고 집에 남겨진 딸과 나는 사면초가에 서 있는 듯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조차 아무것도 없었다. “아내를 따라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매일 생각했고, 자주 되뇌었지만, 하나밖에 없는 딸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잘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아내와 함께 우리 가족이 울고 웃던 날이 모두 머리에서 회전하고 순간순간 나타났다. 심장을 끄집어내는 듯했고 온몸이 기지개를 필 수 없게 밧줄로 묶어 놓은 것 같았다. 어느 날 아내가 나타나 내 손을 잡아 주었다. 현실이기를 바랐지만 꿈이 나를 앞서가고 시간은 조각조각 나뉘어 잘 맞춰지지 않고 어제의 기억조차도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아내가 먼저 하늘로 떠난 후 나는 아내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으로, 아내는 평생 희로애락을 같이하며 사랑하고 아끼며 행복을 만들며 내 삶의 동반자이자 전부로서 아내의 슬픔을 몸과 마음으로 도저히 견딜 수 없었고, 아내가 떠난 후 내 삶은 일분일초가 지옥과 죽음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날 이후의 시간은 나에게 필요 없는 시간이었고 삶을 살아가는데 사치의 시간이었다. 매일매일 삶을 살아가는 시간과 공간에서 하루하루 숨을 도저히 쉴 수가 없었고 때로는 내가 어디로 길을 갔는지 길을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내가 움직이고 이동하는 공간에는 항상 아내의 체취로 가득하였다. 1년 내내 24시간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고 낮이나 밤이나 잠을 이루지 못한 적이 1년을 넘어갔다. 오늘이 괜찮으니 내일도 좋은 일이 있겠지. 이렇게 항상 외쳤지만, 이제는 행복도 나와는 무관한 것 같았다. 내가 무슨 엄청난 욕심을 부린 것도 아닌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을 겪게 하는지 하느님이 정말 원망스럽고 화가 났다. 매일 밤 “주여,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주여, 어디에 계시나이까?”를 외쳤고 하느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1년, 2년이 흐르고 아내와 함께했던 공간은 재건축으로 인하여 신축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고 아내와 함께 항상 같이 있는 것을 상상하면서 오십 대 중반에 홀로서기 연습을 하고 있다.
아내와 사별한 이후 나는 심장병 중 협심증 진단을 받았고 3개월 또는 6개월 간격으로 대학병원에 정기 관찰을 하러 간다. 작년 2월부터 벌어진 세상은 나를 더 심각하게 만들었고 나와 같은 기저 질환이 있는 환자에게는 지금 이 세상이 공포의 세상이 되어버렸다. 그런데도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바이러스로 인해 변해버린 사회에서 사람들과 신뢰의 그물이 무너지고 얼어붙어 버린 인간관계는 언제 녹을지 모르는 세상으로 점점 이어지고 있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신뢰의 관계로 돌아가는 것은 세상을 사는 우리들의 기본적인 삶의 생활이지만 지금의 세상은 이전의 웃고 즐기고 행복한 생각을 하는 세상이 아닌 감정이 지워져 버리고 불신의 관계로 세상이 바뀌어 버렸다.
오늘도 하나밖에 없는 예쁜 딸에게 매일 하는 말은 “코로나 시기에 몸조심해. 정말 조심해야 한다!”이다. 나는 매일매일 마음속으로 빈다. “나의 딸과 자유롭게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는 날이 빨리 돌아오기를… 그리고, 얼굴에 환한 웃음과 즐거움과 행복이 다가오기를….” 이 세상의 하루하루를 삶을 사랑하고 가슴으로 세상을 느끼고, 비록 아내가 보이지는 않지만, 지금의 삶도 긍정적인 생각으로 매일 매일 감사하는 생활을 시작하고 있다.

박치준 미카엘인천교구 가좌동본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