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이 9.75m의 라파엘호 재원
라파엘호 크기와 형태를 알 수 있는 자료는 페레올 주교가 1845년 10월 29일 강경에서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지도자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와 다블뤼 신부가 1845년 10월 23일 충청도 공동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이다.
라파엘호의 크기에 대해 페레올 주교는 길이 25피에(pied, 약 8m), 너비 9피에(약 2.8m), 깊이 7피에(약 2.2m)라고 했다. 반면, 다블뤼 신부는 길이 30피에(약 9.74m), 너비 12~13피에(약 4.2m), 깊이 8피에(약 2.6m)라고 했다. 문제는 둘 다 실측이 아니라 눈대중으로 어림잡은 것이다. 일본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1910년대 「어선조사보고서」에 따르면 황해도 옹진군 안강만 어선이 길이 9.74m, 너비 3.61m, 깊이 1.13m로 다블뤼 신부가 설명한 길이와 똑같고, 너비는 라파엘호가 약 1m 더 넓고, 깊이는 안강만 어선이 라파엘호보다 약 1.46m 낮다.
이를 토대로 최근 ‘라파엘호 규모에 관한 고찰’ 연구 논문을 발표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홍순재 학예연구사는 라파엘호 크기를 길이 9.75m, 너비 4.22m, 깊이 1.62~1.94m로 추정했다. 홍 연구원은 추정 근거로 “페레올 주교가 밝힌 규모대로라면 배의 복원성이 없어 전복되는 선형이다. 반면 다블뤼 신부가 밝힌 배의 규모에서 깊이를 8피에보다 5~6피에 적게 하면 복원성을 확보하고 어선으로서 특징을 갖출 수 있는 길이와 너비, 깊이가 된다”고 설명했다.
라파엘호 모양은 조선 후기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평저형’이었다. 쇠못은 단 한 개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나무못으로 널판을 이어 만들었다. 서양 배는 모두 방수를 위해 타마유(콜타르)를 발라 배의 틈새를 메우는데 라파엘호는 천이나 얇은 대나무 껍질로 틈을 막았다. 갑판도 없다. 배 중간에 나무판자를 대 공간을 세 구간으로 구분해 놓았을 뿐이다. 비가 오거나 파도가 들이닥치면 고스란히 맞고 차오르는 물을 열심히 퍼내야만 한다. 5m 정도 되는 돛대는 2개로 앞쪽은 바로 서 있고, 뒤쪽은 기울어져 있다. 돛 줄은 새끼줄과 칡넝쿨로 만들었다. 손가락 5개 두께의 나무판자 한 개가 키 역할을 했다.
라파엘호는 조선 후기 서해안에서 활동한 전형적인 어선이다. 조수간만의 차가 심하고 넓게 펼쳐진 갯벌, 파장이 짧고 가파르고 거센 파도에 적합한 구조이다. 그래서 선박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먼바다 항해가 불가능한 배”라고 했다. 다블뤼 신부도 앞의 편지에서 바랑 신부에게 “신부님께서는 조선 선원들이 폭풍우 속에서 살아남아 상해까지 가게 된, 완전히 하느님의 섭리라고밖에는 볼 수 없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라며 “망망대해 가운데서 무엇을 한단 말입니까! 하느님의 자비심에 의지하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라고 썼다.
라파엘호 항로
김대건 부제는 25상팀(100centime=1프랑)짜리 나침반과 프랑스에서 보내온 ‘바다의 별 성모 마리아’ 상본 한 장에 의지해 중국 강남으로 가는 항해를 시작했다. 임성룡을 비롯한 네 명의 뱃사람도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다. 김대건 부제도 1842년 10월 초 산동대목구장이며 남경교구장 서리인 베시 주교가 마련해 준 돛이 5개 달린 150톤급 정크선을 타고 상해에서 요동반도 양관까지 여행해 본 것이 전부였다. 그럼 김대건 일행을 태운 라파엘호는 어떤 항로로 중국 강남을 향해 떠났을까?
두 가지로 추정할 수 있다. 하나는 한강을 빠져나와 서해안 연안을 따라 발해만 산동반도를 거쳐 중국 남해안 연안으로 가는 ‘남방연해로’이다. 다른 하나는 흑산도에서 중국 절강성의 관문인 주산열도 정해항과 영파로 바로 들어가는 ‘서해 남부 사단항로’이다. 이 두 항로는 삼국시대 때부터 이용해온 무역로였다.
라파엘호 항로에 관한 연구는 지금까지 없다시피 하지만 암묵적으로 ‘사단항로’를 이용했을 것으로 인지해 왔다. 김대건 신부 일행이 조선으로 귀국할 때 제주도에 표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자는 ‘남방연해로’에 무게를 더 두고자 한다. 중국 출국길과 조선 귀국길 모두 ‘남방연해로’를 이용했고, 귀국길 폭풍우로 표류하면서 사단항로 해류를 타고 제주도에 닿았다고 본다.
기자가 ‘남방연해로’에 무게를 두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김대건 부제가 배로 상해에서 요동반도까지 여행한 경험이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크선 역시 서양 배와 달리 연안을 따라 항해했기에 상세하게 그려진 해도가 없어도 서해를 가로지르는 것보다 안전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둘째, 임성룡이 조기 무역을 했기에 어느 정도 한강을 빠져나와 발해만으로 가는 뱃길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셋째, 김대건 부제는 중국 배를 만나면 돈을 주고 강남까지 라파엘호를 예인해 달라고 부탁하려 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 근거로 김대건 신부가 1845년 7월 23일 상해에서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 내용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마침내 뜻밖에 산동 배 한 척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그 배는 우리를 보더니 겁을 먹고 지나가 버렸습니다. 저는 기를 흔들고 북을 치면서 그 배를 불렀습니다. 처음에는 오려고 하지 않더니 측은한 마음이 들었는지 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배로 올라가 선장에게 인사하고는 우리를 상해까지 끌고 가 달라고 청하였습니다.…마침내 그는 1000원을 주겠다는 약속에 제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이 편지에서 ‘산동’을 주목하자.
네번째,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와 함께 귀국길에 오를 때 라파엘호는 상해에서 산동까지 가는 중국 배에 밧줄을 묶고 항해를 했다는 점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