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다. 시골에서 살 때에는 산자락 아래로 고이는 바람을 나무가 막아주어 트인 골을 따라서 휘돌아 마을 밖으로 나가니 내 얼굴에 닿는 바람이 아프게 느껴지지 않았는데, 도심의 빌딩 숲사이로 휘몰아치는 바람은 건물마다 제 몸 부딪혀 결국 사나운 ‘바람 싸다구’가 되어 아프게 한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매일 흙을 보고, 딛으며 시작했던 나의 하루가 아스팔트를 보고 딛으며 시작하고 있다. 주변에 계신 분들께서는 촌놈이 상경했으니 그 어려움을 염려하시는 말씀들을 전하시곤 한다. 12년을 흙바닥에서 시작했으니 분명 정서적으로 다름을 느낀다. 그런데 나는 서울역 한복판이, 광화문 한복판이 밭처럼, 논처럼 여겨진다. 아직 일구지 않은 황무지처럼 다가온다. 그러니 일굴 수 있는 희망이 보인다. 이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려면 어떻게 일궈야 할까?
며칠 전 저녁에는 남대문 앞에서 밥 나눔을 하시는 수녀님을 찾아가 함께 나눔을 하였다. 어디에서들 오셨는지 봉사자들이 와계셨고, 수녀님들도 와계셨다. 누군가가 능숙하게 승합차 안에 접힌 상을 빼서 자동차 뒤에 펼쳐 놓았다. 또 누군가는 밥을 푸고, 누군가는 국을 퍼서 따뜻한 국밥을 마련하였다. 추운 겨울밤 따뜻한 국물이 식을세라 종종걸음을 거의 뛰다시피 하여 지하도와 서울역 텐트를 향하였다.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하시는 분들도 계셨다. 노숙인들 가운데에는 일종의 반장님도 계셔서 밥 나눔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 그 많은 노숙인 가운데 어떤 분들이 받지 못하셨는지를 알아보고 모두가 배부를 수 있도록 도와주신다. 마치 오천 명이 예수님 앞에 모여앉아 빵을 받아먹을 때, 예수님으로부터 빵을 받아 군중에게 나눠주었던 제자들처럼 반장님들은 음식을 받아 배고프신 한 분 한 분께 전해드렸다. 나는 이 나눔의 밥상이 성사로 다가왔다. 접이식 상은 제대요, 따뜻한 국밥은 사랑의 빵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님이 빵이 되어 오시는 그 거룩한 신비는 아무도 배고프지 않도록 하려는 주님의 바람이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배부른 이들에게 음식은 별 의미가 없다. 그런데 허기진 이들에게 음식은 간절함이다. 바꿔서 생각해보면 생명의 빵에 허기진 하느님 백성들에게 성체는 주님과의 일치의 길에 이르게 하는 너무도 간절한 양식이지만, 세상의 온갖 가지 맛에 길들어 더는 하느님과의 일치를 갈망하기를 잊은 이들에게는 제병일 뿐이다.
언젠가 나는 농사지으며 계속 그림을 그리라고 권하는 분들께 이렇게 말씀드렸었다. “저희는 밭에다 그림을 그려요.” 씨앗을 심고, 가꾸고, 열매 맺는 과정 안에서 나타나는 그 아름다움이 예술작품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돌보는 손길이 마치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다가와서 그렇게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이제 도심 한복판으로 왔으니, 나는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다. “저는 이제 광장 한복판에서 그림을 그려요”라고. 오고 가는 사람들의 눈빛에서 나는 읽을 수 있었다. 밥을 나눌 때도, 피켓을 들고 서 있을 때도, 사람들의 마음 밭이 녹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밑그림 그리듯, 밭갈이하듯, 사람들 서리[人間]에서 땅의 얼굴을 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성령께 인도되어 요르단 강으로 가셨다. 광화문 한복판에서 ‘기후위기’를 적은 피켓을 들고 서 있는 동안 나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는 음성을 새기게 되었다. 세례받으신 주님께서는 성령께 인도되어 광야로 가시고, 끝까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도 저마다의 길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도록 재촉하고 계시다. 그래서 나는 이제 ‘정의와 평화, 그리고 창조질서 회복’이라는 작품명에 맞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꺼운 발걸음을 옮기고 싶다.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조경자 수녀(한국천주교여자수도회장상연합회 JPIC분과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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