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신자들 만난 경원은 어디인가
조선 초기 경원부는 여진족으로부터 자주 침탈을 당했다. 그래서 태종은 1406년 이곳에 무역소를 설치하게 하고 여진족과 소금과 쇠를 거래하게 했다. 그리고 아버지 태조의 조부모 묘인 안릉과 덕릉을 함주로 옮기게 했다. 세종 역시 국경을 지키기 위해 경원부에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도록 했다.
경원도호부에는 몇 개의 물줄기가 있다. 그중 오늘날 연변에 중국에서는 ‘토문하’라고 하고 조선에서는 ‘해란강’이라고 부르는 강이 있다. 조선 관리들은 토문하를 ‘두만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해란강의 한 줄기가 지금의 두만강 하구로 이어져 있다. 1712년 조선과 청이 세운 백두산정계비에도 국경을 ‘동으로는 토문으로 한다’고 분명히 쓰여 있다. 토문은 지금의 두만강과 엄연히 다르다. 복기대(인하대 융합고고학) 교수를 비롯한 역사학자들은 지금도 두만강 유역은 험준해서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지역이기에 옛날 여진족들이 중심 거주지역으로 두만강 유역으로 보는 것은 많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신학생 김대건이 조선 신자들과 만났던 경원의 위치에 관해서 다시 연구할 필요가 있다. 김대건이 건넌 두만강이 지금의 두만강인지, 해란강을 일컫는 토문강인지 말이다. 그리고 무역장이 열렸던 경원이 어디인지 말이다.
아울러 김대건이 목숨을 걸고 여행했던 이 지역이 100년 뒤 프랑스 선교사들이 아닌 독일의 수도승 선교사들에 의해 우리 민족에게 복음이 전해졌다는 것도 기억할 일이다.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과 연길수도원 수도자들이 원산대목구와 연길대목구에서 펼친 복음 선교 여정이다. 지금의 두만강 일대에서 가장 가까운 육도포성당은 원산대목구에서 처음으로 세운 성당이자 가장 먼저 사라진 성당이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후 대한독립군의 활동지인 육도포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곳 초대 주임 신부인 루치오 로트 신부는 이후 오랫동안 덕원수도원 원장으로 소임을 하다 6ㆍ25 전쟁 때 평양에서 공산군에게 총살돼 지금 시복 청원 중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