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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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존경하는 교황의 제의 입고 미사 하는 기쁨이란

참 빛 사랑 2021. 6. 22. 21:10

[미카엘의 순례일기] (24)성 바오로 6세 교황의 제의

▲ 한 사제가 카스텔 간돌프 빌라노바의 성 토마스 성당 제대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있다.

 


오직 두 다리와 지팡이에만 의지해 여행해야 했던 중세의 순례자들에게 예루살렘과 로마는 너무나도 멀고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어찌나 많았는지 기혼자의 예루살렘 순례를 금한다는 기록이 남아있기까지 합니다. 수년간 제대로 된 지도 한 장 없이 죽음의 위험을 마주하며 걷고 또 걸어야 하는 순례의 길은, 말 그대로 고난과 사투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성지에서 순례의 증거를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길 원했던 것도 당연했겠지요. 예수님께서 입으셨던 수의, 십자가 조각, 못이나 가시관과 같은 물품들은 너무 귀해서 일반인들은 감히 꿈조차 꾸지 못했고, 성인들의 유해나 유물들 또한 인기가 매우 높았던 탓에 몰래 무덤을 파내는 장사꾼들을 피해 성인의 무덤 위치를 숨기는 일도 많았습니다. 성지 주위에 늘어선 갖가지 기념품 가게들은 예나 지금이나 큰 호황이었지요.

로마에서 남쪽으로 한 시간가량 떨어진 ‘카스텔 간돌포’는 알바노 호숫가에 있는 작고 아름다운 도시입니다. 여름에도 매우 시원한 지역이어서, 수 세기 동안 교황님의 여름 휴양지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황님들이 사용하던 별장은 몇 년 전부터 박물관으로 조성되어 일반인들에게 개방되기도 했습니다.

한 번은 카스텔 간돌포의 내부를 둘러본 후에 잠시 자유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교황님의 별장 앞 소광장에 자리한 ‘빌라노바의 성 토마스 성당’에 예약된 미사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였습니다. 순례자들은 작고 예쁜 카페와 꽃집이 자리한 광장 주위를 둘러보거나 한가로이 호수 주위를 산책했습니다. 지도 신부님께서는 성당에서 기도를 마치신 후 제의방으로 향하셨고, 이탈리아인 신부님께서도 한국 순례단은 처음이라며 아주 기쁘게 맞아주셨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이 성당에서 여러 교황님께서 자주 미사를 집전하셨다고 설명하며 제의 여러 벌이 걸려있는 옷장을 열어주셨습니다. 그러더니 어떤 제의를 입겠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이쪽의 제의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입으시던 것, 그 옆에 걸린 제의는 성 바오로 6세 교황님, 그리고 그 옆은…. 지도 신부님께서는 예상치 못한 배려에 깜짝 놀라시면서, “저는 항상 성 바오로 6세 교황님을 특별히 존경해 왔습니다. 괜찮다면 그분께서 사용하시던 제의를 입고 싶습니다” 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셨습니다.

때는 초여름이었으나 제의는 겨울에나 입을 법한 두꺼운 것이어서 신부님께서는 미사 내내 땀을 연신 흘리셨습니다. 하지만 미사를 봉헌하는 동안 신부님의 얼굴에는 기쁨의 미소가 가득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마지막 축복을 주시기 전, 신부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동안 여러분들께서 성지를 순례한 뒤 기념품 가게에 들러 물건을 구입하는 모습을 조금은 부정적으로 생각해왔습니다. 사진만으로도 기억을 남길 수 있는 시대에 굳이 돈을 주고 성물을 사야만 하는지 의문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존경하고 사랑하던 성인 교황님의 제의를 입고 그분께서 미사를 집전하신 이 자리에서 미사를 봉헌하게 된 저는 인간이란 때로는 오감을 통해서도 큰 감동을 받을 수 있음을 이제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제의가 너무 두꺼워서 속옷은 땀에 젖었지만 말입니다.”

순례단 모두는 함박웃음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물론 성인의 유해에 친구(親口)하거나 성인의 제의를 입고 미사를 봉헌했다고 해서 우리가 더 거룩해지는 건 아닐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입한 기념품이 그저 성지를 다녀왔다는 추억에 머물지 않고, 여기서 느낀 기쁨과 감동을 되살리며 하느님께 나아가는 도구이자 채찍이 되기를 원합니다. 저 역시 미사를 마치고 이 앞 기념품 가게에서 바오로 6세 교황님이 그려진 작은 책갈피를 사려고 합니다. 성경에 그 책갈피를 꽂아놓고, 언제 어디서든 미사를 봉헌할 때마다 오늘 이곳에서 느꼈던 기쁨을 기억하며 기도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이렇게 먼 길을 떠나 주님의 발자취를 좇아온 이유이자 목표일 테니까요.”

크게 보면, 성지 순례 그 자체가 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주님과 성인들이 살았던 바로 그곳을 찾는다고 해서 그분들의 완덕이 우리에게 갑자기 스며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삶의 흔적들을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끼는 일은 우리에게 또 다른 신앙의 전환점을 만들어줄 수 있습니다. 그분들의 삶이 단지 성경 속의 실체 없는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우리가 밟고 있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고 끝이 났다는 것,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그분들이 계신 하느님 나라에 언젠가 이를 수 있으리라는 것 말입니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