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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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박해 피해 지하로 숨어들어 도시를 만들다

참 빛 사랑 2021. 5. 18. 18:37

[미카엘의 순례일기] (19)터키의 지하도시 ‘데린쿠유’


터키의 중앙 고원지대인 ‘카파도키아’는 신비로운 바위 계곡으로 유명한 장소입니다. 마치 화성에 온 듯한 느낌 때문에 영화 스타워즈 1편의 배경이 되기도 했던 이 계곡 지대는, 수억 년 전 화산 폭발로 인해 생겨난 화산재와 용암이 만들어낸 온갖 기괴한 모습의 바위들로 가득합니다. 바위들은 생김새에 따라 낙타 계곡, 비둘기 계곡, 버섯 계곡 등의 이름이 붙어 있지요. 저는 경험하지 못했지만, 동트는 새벽에 열기구를 타고 이곳을 내려다보는 순간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더군요.

하지만 터키에는 세상에 하나뿐이라는 이런 아름답고 기괴한 계곡들보다도 훨씬 더 제 마음을 사로잡는 장소가 있습니다. 바로 병풍처럼 늘어진 산으로 둘러싸인 평야 지대, ‘데린쿠유’입니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지닌 데린쿠유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땅이지만, 사실 그 밑에는 거대한 지하도시가 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 들어간 곳이지요.

이후 역사 속에서 완전히 잊혔던 이 지하 도시는 1960년대 초에 근처 마을에 살던 농부가 땅속으로 사라진 닭을 찾다가 발견해 다시 세상에 알려집니다. 조사에 따르면 이곳은 이미 기원전부터 만들어져 있었으며, 처음에는 주변 생활의 편의를 위해 지하에 판 작은 동굴이었으나 후일 박해를 피해 땅속으로 들어간 신앙인들에 의해 큰 규모로 확장된 것으로 보입니다. 현재 지하 8층까지만 개방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약 20층가량이고, 한때 2만여 명이 그 안에서 함께 살았다고 추정합니다. 말 그대로 하나의 도시였던 셈입니다. 또한, 8km 정도 떨어진 또 다른 지하 도시와 연결된 통로가 발견되어, 그 당시 데린쿠유와 같은 곳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로마에 의한 박해뿐 아니라 이어진 이슬람의 박해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데린쿠유와 같은 지하도시에서의 생활을 지속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창과 방패를 들고 내려올 수 없도록 몹시 비좁게 만들어진 통로를 따라 점차 아래로 내려가 봅니다. 허리를 숙이고 낑낑거려도 가방이 자꾸 천장에 걸릴 정도로 좁은 곳이 많습니다. 지하 곳곳에는 사람이 거주했던 동굴뿐 아니라 부엌과 외양간, 와인 저장고, 학교와 감옥, 그리고 무엇보다도 성당이 만들어져 있습니다. 깊은 땅속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며 찬미가를 노래했을 그들의 모습이 바위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광장 중앙에는 작은 돌기둥이 서 있는데, 그리스도인으로서 하지 말아야 할 행위를 했을 때 공개적으로 벌을 받아 묶였던 곳이라고 합니다. 어쩌면 자유롭지 못한 일상 때문에 더욱 엄격하게 규율을 정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성당은 십자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고, 때로는 사제 양성을 위해 쓰였을 작은 학교는 선생님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앉아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올리브 기름으로 만든 작은 등잔만이 어두운 그 공간을 채웠겠지만, 어떤 어둠도 그들 마음속 그리스도의 빛을 몰아내지는 못했을 테지요. 지상에서 지하를 연결하는 수십 m에 달하는 환기구는 땅 위에서는 덤불이나 작은 우물의 형태로 숨겨져 있었으며 외부 공기를 들여오는 유일한 통로였습니다. 아래에서 환기구를 통해 바라보는 조그마한 태양 빛은 어쩌면 구원을 향한 희망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지하 동굴을 순례하고 밖으로 나오면 어쩐지 큰 숨부터 들이쉬게 됩니다.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미나렛(모스크 첨탑)에 달린 스피커에서 ‘아잔’ 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매일 다섯 번씩 바쳐야 하는 무슬림의 의무 기도 시간 중 저녁 기도를 알리는 소리입니다. 인구의 98%가 무슬림인 터키를 순례하면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소리가 바로 이 아잔입니다. 당시 어두운 지하에서 살아가던 그리스도인들도 이것을 매일 들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지하에서 태어나 지하에서 생을 마감했을 수많은 신앙인은 햇빛을 보지 못해 생기는 골다공증, 칼슘 부족으로 척추나 다리의 변형이 생기는 구루병, 다리의 부종으로 신경장애가 오는 각기병, 심장병, 시력 약화, 우울증 등 평생 질병을 달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 지하에서 벗어나 지상에서의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간절히 꿈꾸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신앙을 위해 그 삶을 선택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분명 하느님의 품 안에서 밝고 평온한 영생을 누리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데린쿠유를 떠나면서, 지하에 살았던 신앙인들의 삶과 함께 현대의 위대한 스승인 토마스 머튼의 깨달음을 새겨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는 회심과 하느님 안에서 살고자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은 평생 살면서 단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매 순간’해야 하는 것이다.”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