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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남북에 사랑 실천한 ‘평화의 사도’… “통일되면 평양교구 달려갈 것”

참 빛 사랑 2020. 8. 23. 20:45

사제 수품 60주년 - 메리놀외방선교회 함제도 신부

▲ 서울대교구 특수사목사제관인 정규하관 성당에서 김대건 신부의 유해를 모신 현시대를 보이며 지극한 한국 교회 사랑을 보여주는 함제도 신부.

▲ 2010년 봄 평성학교를 찾은 함제도 신부가 학생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1960년 사제품을 받고 한국으로 향하기에 앞서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조부모, 여동생들, 어머니와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메리놀외방선교회 한국지부 함제도(Gerard Edward Hammond, 87) 신부 하면, 남과 북이 동시에 떠오른다. 30년은 청주교구에서, 또 다른 30년은 소외된 북녘 형제들을 위해 투신했기 때문. 지난 6월 11일 사제수품 60주년을 맞은 함 신부는 13일 파주 참회와 속죄의 성당에서 의정부교구장 이기헌 주교 주례로 사제수품 60주년 기념 미사를 봉헌했다. 원래는 미국 뉴욕주 웨스트체스터 오씨닝 메리놀회 본원에서 기념하려 했지만, 코로나19 사태로 미국에 가지 못해 국내에서 기념했다. 이날 미사는 최근 가톨릭동북아평화연구소가 함 신부의 구술을 받아 펴낸 「선교사의 여행- 남북한을 사랑한 메리놀회 함제도 신부 이야기」 출판기념회도 겸했다. 앞서 함 신부는 12일 서울대교구 정규하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남북을 오간 60년 선교 여정의 소회를 들려줬다.



함제도 신부는 60년 전 그날을 먼저 떠올렸다. 그땐 항공편이 없어서 고향 필라델피아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이동, 화물선인 바이우 스테이트호를 타고 출발해 3주를 짐칸에서 견디며 1960년 8월 29일 인천에 입항했다.

“그때 부산을 거쳤는데, 부산 부둣가는 전쟁의 피해를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어요. 지독히도 가난했던 피란민들로 가득했죠. 함께 왔던 메리놀 수사가 구걸하는 여성에게 자신의 옷을 건넬 지경이었어요. 언덕배기에 빼곡했던 판잣집도 잊히지 않습니다. 전쟁이 얼마나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지를 피부로 느꼈어요.”

그때의 기억은 한국에서 선교하는 내내 ‘원체험’과도 같이 강렬하게 남았다. 끝까지 선교사로 살 수 있을지, 걱정했지만 고통받는 민족을 보며 그는 “죽을 때까지 선교지에서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는 이뤄졌다.

인천 월미도에서 내려 먼지 풀풀 날리는 비포장길을 달려 서울 메리놀회 한국지부에 들어선 지 얼마 안 돼 그는 선배들에게 한국 이름을 선물 받았다. “해먼드에서 함이라는 성씨를, 제라드에서 제도라는 이름을 받았다”며 그는 “족보 없는 청주 함씨 시조이자 사서함 함씨”라고도 덧붙여 회견에 참석한 기자들을 웃게 했다.

입국 직후 몇 달간 미 육군 군종 신부를 하며 우리말을 배운 그는 1961년 6월 청주교구에 파견돼 초대 청주교구장 제임스 파디 주교 비서 겸 관리국장에 임명돼 8년간 일했다. 한국인 사제가 교구에 단 1명도 없었던 시절이다. 처음 3년간은 교구장 비서를 하면서 성심보육원장으로 일했고, 1964년부터는 교구 일과 함께 청주 북문로(현 서운동)본당 주임으로 3년간 사목했으며, 1966년 수동본당으로 옮겨 16년을 살았다. 수동성당은 특히 성당 땅도, 성당도 함 신부가 조부모에게 유산 중 자신의 몫을 미리 달라고 해서 세워 구석구석 그의 손때가 묻지 않은 데가 없다. 공소만 14곳이나 되던 괴산본당에서도 충주 성심맹아학교를 함께 돌보며 8년을 살았다.

“청주 신자들은 참 열심히 살았어요. 가난하지만, ‘함께’ 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적으로 이게 중요하지요. 구호물품이 와도 함께 나눴고, 국수 공장도 함께 운영했고, 집도 함께 지었고, 신용협동조합도 함께 해봤습니다. 물론 가장 행복했던 건 세례성사를 할 때였죠. 요즘도 청주가 자꾸 생각납니다. 이젠 본당에 가지 못하니 공소라도 가고 싶은데, 공소도 자리도 없네요. 공소가 아니라 묘지로 가야 하나 봐요. 죽으면 청주에 묻힐 겁니다.”

1989년 서울로 돌아왔다. 메리놀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에 선출됐기 때문이었다. 3년만 하다가 청주교구로 돌아가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지부장직을 두 번이나 역임한 뒤 1995년 북한에 수해가 나면서 기근이 발생하자 대북 지원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청주로 돌아가려던 꿈은 멀어졌지만, 대신 북한으로 가는 길이 열려 지난해 3월까지 무려 60차례나 북한을 다녀오게 됐다. 그 사이 한국지부장직을 5번이나 연임했다.

“실은 첫 방북은 1990년이었어요. 미국 세턴 홀 대학과 북한 간 교환교수 프로그램에 함께해 방북했지요. 그러다가 1998년부터 유진벨재단과 함께 결핵 환자들을 돌보게 됐어요. 지난해 3월에 방북한 게 마지막인데, 북한에 지역별로 결핵 센터와 병원을 다 다녔지요. 요양병동도 지었어요. 북한에선 1년에 2만 명씩 결핵 환자들이 생기니까, 제일 시급한 게 이들을 돌보는 일입니다. 그런데 벌써 1년 6개월이 넘도록 못 갔고, 약을 챙겨주지도 못했어요. 목숨이 걸린 일인데, 갈 방법이 없어요. 저희가 북에 다시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세요.”

우리 나이로 88세 노구를 이끌고도 방북을 꿈꾸는 노사제의 선교 열정이 지극하다.

함 신부는 “북한, 특히 평양교구는 통일되면 맨 먼저 달려가야 할 선교지이기에 우리 메리놀회는 북녘 형제들과 함께하지 않을 수 없다”며 “75년 분단의 골은 깊고도 깊지만, 우리는 고통받는 겨레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노력을 계속 해야 하고, 남북이 대화를 이어나가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화제를 돌려 함 신부의 성장 과정을 들었다. 그는 1933년 8월 15일생으로, 펜실베니아주 팔라델피아의 아일랜드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고등학교 물리교사였던 헨리고 해먼드씨, 어머니는 잡지사를 운영했던 마리아 클라라 해먼드씨다. 함 신부는 1남 2녀 중 장남으로, 1947년 9월 메리놀회에 입회, 메리놀신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에 사제품을 받았다. 선교지에 사는 동안 조부모, 부모도 모두 세상을 떠났고, 가족 중 생존자는 이제 두 여동생밖에 없다. 소신학교 시절에 만나 형제처럼 지낸 장익 주교도 지난 5일 하느님의 품으로 떠나 요즘은 더 외롭기만 하다.

그렇지만 함 신부는 “요즘 들어 선교는 로맨스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선교사가 되려면 세상, 특히 선교지와 사랑에 빠져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북과 동시에 사랑에 빠진 노 선교사제의 사랑 나눔은 분단된 남북을 잇는 평화와 화해의 다리가 되고 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