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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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연재

종교를 넘어 언어와 예술까지… 깊은 영성과 넓은 식견 겸비한 목자

참 빛 사랑 2020. 8. 17. 20:02

장익 주교의 삶과 신앙병상에 누운 장익 주교 손에 때때로 힘이 잔뜩 들어갔다. 자그마한 나무 십자가를 쥔 손이었다. 암세포는 이미 퍼질 대로 퍼진 상태였다. 극심한 고통이 찾아올 때마다 그는 십자가를 움켜쥐었다. 주치의에겐 평소 진통제도 필요 없다고 해뒀다.

7월 말경 장 주교를 병문안하고 온 이들은 한결같은 이야기를 전했다. “주교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에 함께하고 있는 듯하다”고. 평소 장 주교 곁을 지킨 춘천교구 사회사목국장 김학배 신부는 “진통제도 마다하신 주교님께선 고통을 기쁘게 받아들이셨다”고 말했다. 마지막엔 눈을 뜰 힘조차 없던 장 주교는 자신을 찾아온 이들의 인사에 말없이 눈물로 대답을 대신했다. 8월 5일 오후 6시 9분. 예수님께선 그의 고통을 거둬 가셨고, 장 주교는 비로소 세상의 십자가를 내려놓았다.

초대 주미대사이자 국무총리를 지낸 장면 박사의 삼남,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어 교사라는 굵직한 이력은 장 주교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다.

2010년 16년간의 춘천교구장직을 내려놓고 은퇴한 그가 마지막까지 심혈을 기울였던 사업 중 하나는 아버지 장면(요한, 1899~1966) 박사의 삶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는 운석장면기념사업회 이사로서 아버지의 정치적, 외교적 삶과 신앙의 발자취가 재조명되기를 바랐다. 어느 자리에 있건, 어떤 역할을 맡건 언제나 반듯하고 정확했던 그의 성격은 장면 박사와도 닮아있다. 집안끼리 친분이 있어 어린 시절부터 장 주교를 알고 지내온 권경수(헬레나) 전 이화여대 교수는 “자기 자신에겐 엄격하고, 교회에 헌신했던 주교님의 삶은 아버지 장면 박사의 가르침과 신앙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라고 말했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한국어 선생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식과 103위 성인 시성식을 위해 한국을 찾은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어로 미사를 주례해 한국 신자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교황의 한국어 실력은 오롯이 장 주교의 공이었다. 바티칸에 한국 대사관이 없던 시절 교황청립 그레고리안대학교에서 유학 중이던 장 주교는 한국 교회와 교황청 다리 역할을 하며 교황의 한국어 교사가 됐다. 김수환 추기경 역시 장 주교가 영어는 물론 여러 유럽 언어에 능통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믿고 맡겼다. 장 주교의 언어 구사 능력엔 누구나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어쩌다 보니 여러 나라에서 공부하게 됐고, 공부하려면 그 나라 말을 먼저 알아야 하니 책 보고 배워서 조금 말할 줄 알게 된 것”이라고 했다.

보편 교회와 한국 교회 두 수장 곁을 지킨 그에게도 때때로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지만, 그는 항상 두세 걸음 물러나 있었다. 한홍순(토마스) 전 주교황청 한국대사는 “1960년대 말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김수환 추기경님 비서로 동행했던 장 주교님을 뵌 적이 있는데 추기경님을 빈틈없이 수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른을 모시는 데는 정말 최고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춘천교구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


장 주교는 서울 세종로본당 주임을 맡던 중 1994년 춘천교구장 주교로 임명됐다.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는 한없이 서툴렀던 그는 자신의 주교 임명 사실조차 본당 신자에게 제때 알리지 못했다. 신자들은 주임 신부가 주교가 됐다는 소식을 방송을 통해 전해 들었다. 게다가 장 주교는 자신을 챙기고 무언가 소유하는 데에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듯이 살았다. 자신에게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 생기면 주변 사람에게 모조리 나눠줬다. 겨울 외투 한두 벌로 십수 년을 지낸 그는 “혼자 사는 노인이 무슨 옷이 필요하냐”며 웃을 뿐이었다. 자신이 지내는 공소 사제관으로 찾아온 이들에겐 손수 만든 파스타를 대접하곤 했다. 그와 함께했던 이들이 “그렇게 겸손하고 검소하실 수가 없다”고 입을 맞춘 듯 이야기하는 이유이다.



예술적 조예로 가톨릭미술가회 지도

미술에도 조예가 깊었던 장 주교는 오랫동안 가톨릭미술가회를 지도하며 교회 미술 발전에 애써왔다. 미술가들이 있는 곳에는 장 주교가 있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그는 사제시절 가톨릭미술가회 회원들을 주일마다 만나 전례와 교회 역사를 직접 가르쳤고, 성당 건축에 미술가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춘천교구장 시절에는 교구에 작은 공소 하나를 지어도 꼭 미술가들과 상의하도록 했다. 장 주교의 묵상 글에 그림을 그리며 10년간 춘천교구 달력을 만들어 온 김형주(이멜다) 화백은 “주교님께서는 작품에 담긴 작가의 숨은 뜻도 알아채실 정도로 작품을 보는 깊이가 남다르셨다”고 말했다. 그의 미적 감각은 집안 내력에서 기인했을 터다. 서울대 미대 초대 학장을 지낸 장발(루도비코, 1901~2001) 화백이 그의 작은 아버지였다. 그는 교회 미술의 중요성과 예술 작품이 지닌 힘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춘천교구가 생긴 이래 55년 만에 탄생한 첫 한국인 교구장 주교였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외국인 사제들이 닦아 놓은 터에 장 주교는 기틀을 세웠다. 그가 춘천교구장으로 재임하는 동안 교구 본당은 38개에서 58개로 늘었다. 교구 사제는 58명에서 97명으로 신자는 5만 2000명에서 7만 7000명으로 증가해 교구 성장을 이끌었다. 겉으로 보이는 성장만큼이나 사제와 신자들의 신앙은 한층 깊어졌다. 성서백주간을 한국 교회에 처음 도입했던 만큼 신자들이 말씀의 삶을 살기를 강조했다. 이와 함께 교구의 첫 한국인 주교로서 외국인 사제와 주교가 미처 보듬지 못한 교구민 정서와 교구 사정을 살뜰히 살폈다. 교구 사제들은 “주교님께서 당시 생각지도 못한 제도를 만들어 실행하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며 “교구 사제라면 누구든 주교님께 항상 존경하는 마음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 사목에 큰 관심, 나눔과 사랑 실천

신부시절부터 남북 화해와 일치를 위한 활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1987년 북한을 방문했던 장 주교는 북한 형제를 돕는 일이 신자들 일상에 스며들도록 노력했다. 한솥밥한식구 운동을 펼치며 교구 내에 한삶위원회를 설립, 인도적 대북 지원에 앞장섰다. 이 밖에도 함흥교구장 서리였던 그는 한국전쟁을 전후로 북한에서 순교한 성 베네딕도회 수도자와 덕원자치수도원구, 함흥교구 및 연길교구 사제들의 시복 예비심사도 기꺼이 도맡았다.

장 주교는 생전 가까운 이들에게도 깍듯이 예의를 갖추며 살가운 곁을 내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만의 방식으로 찬찬히 사랑을 전해줬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그는 춘천교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이곳에 뼈를 묻겠다”고 했고 그의 다짐대로 많은 이의 기도 속에 춘천 죽림동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박수정 기자 catherine@cpbc.co.kr

 

춘천교구 발전에 헌신한 겸손한 사제, 하느님 품에 안기다

장익 주교 선종 - 장례 미사 이모저모8일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에서 봉헌된 제6대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장례 미사는 오랫동안 고인과 함께했던 한국 교회 주교단과 사제, 신자들의 애도 속에 엄숙하고도 경건하게 거행됐다. 16년 동안 교구장 주교로서 춘천교구 발전을 위해 헌신한 기간까지, 57년이란 반세기 넘는 세월 동안 폭넓은 학식과 겸손을 겸비한 사제로 살아온 고인과의 이별에 모든 이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하느님의 크신 자비로 반세기 이상을 부당한 사제로 살도록 허락하신 과분한 은총을 입은 주님의 종, 죄인 장익 십자가의 요한 나는 그저 더없이 고맙고 송구한 마음뿐입니다.”(장익 주교 유언 중에서)

장익 주교는 마지막까지 스스로를 ‘죄인’이라며 한없이 낮췄다. 9개국 언어에 능통할 뿐 아니라, 우리 고전과 동서양 철학과 유교 사상 등 다방면에 풍부한 학식을 겸비했지만, 누구라도 그런 장 주교의 모습을 높이면 극구 손사래를 치던 겸손한 주교였다.

장 주교는 이날 발표된 마지막 유언에서 “나 무엇으로 주님께 갚으리오? 내게 베푸신 그 모든 은혜를. 구원의 잔을 들고서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네”(시편 116,12-13)라며 그저 목자로 살아온 자신의 삶 전체를 크나큰 주님의 은총으로 여겼음을 전했다.

장 주교는 ‘하나 되게 하소서’(요한 17,11)라는 그의 주교 수품 성구대로 춘천교구와 남북, 보편교회가 하나 되도록 평생 헌신한 목자였다.



○…연일 장맛비로 폭우가 예상됐지만, 장례 미사 당일인 8일 오전 춘천시 하늘은 햇볕이 내리쬐었다. 이날 장례 미사에는 주교단 30여 명과 함께 사제, 수도자, 신자 500여 명이 참석했다. 코로나19 여파로 성전에는 150여 명만 입장해 거리를 두고 앉았으며, 많은 이가 성당 마당 야외 좌석을 메웠다.

방역 수칙을 지켜야 하는 탓에 성가를 부르는 것조차 어려운 상황 속에도 유가족을 비롯해 장 주교와 평소 가까이 지냈던 사제와 신자들은 이따금 슬픔을 참지 못하고 마스크 너머로 흐느꼈다. 이날 장례 미사에는 장 주교의 외조카 공요한(요한)씨를 비롯해 유가족 10여 명이 자리했다. 앞서 6~7일 이틀 동안에는 장맛비와 코로나19를 뚫고 장 주교의 마지막 모습을 보기 위해 각계 인사와 교구민들의 조문행렬도 이어졌다. 장례 미사와 빈소 풍경은 유튜브를 통해 생중계됐다.



○…고별식에서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과 주교회의 의장 김희중 대주교의 애도 메시지가 낭독됐다.

염 추기경은 “9개국 언어를 하신 장 주교님의 열 번째 언어는 당신의 말과 행동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랑의 언어’였다”며 “주교님의 해박한 지식과 깊은 영성은 신자들에게 큰 힘과 위로가 됐다”고 추모했다. 염 추기경은 특히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은 우리 국민들의 고통과 질곡의 삶 한가운데를 사시면서 모두의 고통과 상처 치유를 위해 노력하셨다”며 “한일 주교교류 모임을 통한 역사 바로알기, 함흥교구장 서리를 겸임하며 북한 신자들을 헤아리는 활동, 인도적 대북지원 및 북한 동포 돕기 사업 등은 모두 하나 되도록 하는 실천이었다”고 전했다.

40년 지기요, 동료 주교로 각별했던 김희중 대주교는 내내 흐느끼는 목소리로 고별사를 읽어내려 갔다. 김 대주교는 “장 주교님은 로마 유학 중 가끔 저를 차에 태우고 다니셨는데, 주교님의 차는 폐차 직전이었고, 비 오는 날에는 녹이 슬어 구멍 난 밑바닥에서 구정물이 올라와 다리를 들어올려야 할 때면 껄껄껄 웃으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며 검소했던 고인의 삶을 떠올렸다. 김 대주교는 “당신이 평소 보여주신 겸손, 검소, 소박함의 가치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 우리를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이끌어줄 것”이라며 영원한 안식을 기원했다.

“주교님, 사랑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미사 후 유가족과 주교단, 교구민은 장례 미사 후 운구 차량에 태워진 고인을 향해 일제히 깊이 고개를 숙였다. 장 주교의 유해는 교구 방침에 따라 화장을 거친 후 춘천 죽림동주교좌성당 뒤뜰 성직자 묘역에 안치됐다.



○…장익 주교의 검소함은 잘 알려져 있다. 성구와 제의는 주교품을 받을 때 마련했던 것만 줄곧 썼고, 누군가 옷을 선물하면 체구가 비슷한 후배 사제들에게 곧장 나눠줬다. 30년 넘은 가방, 한두 개뿐인 외투, 고장이 나도 몇 번이고 고쳐 쓴 컴퓨터와 전자제품 등이 그의 소박한 삶을 대변한다. 평소 도토리 임자탕과 두부를 좋아했던 장 주교는 가끔 유학 시절을 떠올리며 주변 사람들에게 파스타 요리를 직접 해주는 등 소탈한 모습을 유지했다.

8년간 실레마을 공소 주교관에서 장 주교의 식복사를 지낸 한요세피나씨는 “제가 편하게 말씀하시라고 해도 늘 존댓말로 이야기하셨고, 산책과 차 한잔 할 때에도 다양한 책과 학문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며 “자상하고 배려심 많은 주교님께서 해주신 파스타가 그립고, 지금이라도 오셔서 말씀을 건네실 것만 같다”고 했다.

춘천교구장 부임 이후 지금까지 아버지와 아들 같은 관계를 이어온 김학배(교구 사회사목국장) 신부는 “이스라엘 성지순례 때 만난 각국의 사제들이 한자리에서 식사하는 중에 장 주교님이 불어, 이탈리아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시며 그들의 대화를 통역했는데, 그들이 너무 소박한 모습의 주교님을 몰라보고 놀랐던 적도 있었다”며 “교구장 시절 여러 본당과 작은 공소를 일일이 방문하셨던 주교님은 6차례에 걸친 항암치료 후 수척해지신 상황에서도 특히 냉담 교우 회두를 걱정하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고 전했다.

같은 서울 혜화동본당 출신으로 어린 시절부터 형제애를 지키며 지내온 정진석 추기경은 본지에 보내온 특별 애도 메시지를 통해 “장 주교님은 나와 성당 친구였고, 성직자로, 주교로서도 각별한 친구였다”며 “교회와 사회의 인재였던 주교님과 한 시대를 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을 함께한 것은 참으로 은총이었다”고 회고했다.

장 주교와 미국 메리놀 소신학교 때부터 동기로, 북한 지원사업에도 함께했던 70년 지기 함제도(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도 “당시 미국에 막 오셔서도 주교님은 언어를 단숨에 터득해 신학교에서 성적도 1등을 했었다”며 “북한과는 늘 평화, 대화, 화해를 강조하셨다”고 전했다.

장익 주교와 동갑내기 육촌지간인 장명선(안드레아)옹은 “주교님은 5대에 이르는 우리 천주교 집안에서도 신앙의 표본이셨다”며 “선종 소식을 듣고 마리아, 요셉 성인께 ‘하느님의 종 주교님을 하느님의 나라로 인도해주십시오’ 하고 기도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sjunder@c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