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혜씨를 바라보는 시선
“스케줄 때문에 바빠요. 좀 피곤하지만 좋아요.” (웃음)
‘인기를 실감하느냐’는 질문에 정 작가가 웃으며 답했다. 정 작가는 요즘 스케줄이 많아도 너무 많다. 그도 그럴 것이 드라마가 끝난 후 몰려드는 인터뷰 요청에 영화 개봉 후 무대 인사, 전시, 출판과 관련해서도 많은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정 작가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다. 길을 가다가도 식당에 가서도 심지어 화장실에서도 사람들은 정 작가를 알아본다. “군산에서 은혜씨와 목욕탕을 갔는데 아주머니들이 자리로 몰려와서 드라마부터 시작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옷을 다 벗고 있는데 말이죠.” 장차현실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장차현실 작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달라졌고 칭찬과 기대를 받고 있다”며 “발달장애인들에게 이렇게 살아가고 있고 이런 일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은혜씨가 총대를 멘 것 같다”고 했다.
은혜씨를 일으켜 세우다
2013년 2월 27일. 장차현실 작가는 이날을 잊을 수 없다. 이날은 정 작가가 처음으로 그림을 그린 날이다. “제 화실에서 잡지 광고를 보고 스프링이 달린 갱지 노트에 연필로 그린 그림이었어요. 그 그림을 보며 은혜씨가 재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됐고 그 이후로 은혜씨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죠.” 정 작가가 지금까지 그린 사람은 4000명이 넘는다.
하지만 20대 정 작가의 모습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은혜씨가 20대가 되니 갈 데가 없었어요. 갈 데가 없으니까 은혜씨가 자기 방에 들어가더니 문을 닫았어요. 그 방을 저희는 동굴이라고 불러요. 그리고 퇴행이 오기 시작했죠.” 정 작가가 마음의 문을 닫은 후 틱장애, 시선 강박, 조현병 등이 찾아왔다. 그의 그런 모습은 가족에게 큰 우울감을 줬다. 장차현실 작가는 “발달장애인이 있는 가족은 그 장애인의 삶이 어떤가에 따라서 나머지 가족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될 수 있겠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 작가가 그림을 그리고 나서부터는 정 작가뿐만 아니라 가족의 삶도 바뀌었다. “이제 살겠죠 뭐. 이제 살겠어요.” 장차현실 작가는 “은혜씨가 무언가 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의욕적으로 달려드는 모습을 볼 때 마지막 카드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며 “그래서 제가 저의 것을 다 던지고 은혜씨를 지지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림은 동굴에 있던 은혜씨를 동굴 밖으로 나와 일으켜 세운 힘이자 가족을 살게 한 힘이었다.
은혜씨, 날아오르다
2020년 서울 종로구 서촌에서 정 작가가 개인전을 할 때였다. 노희경 드라마 작가가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했다. 새로 쓰는 드라마에 다운증후군을 가진 장애인이 등장하면 좋겠는데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 인터뷰 시간이 부족했고 노 작가 작업실에서 추가로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그 인터뷰가 드라마 캐스팅으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처음에는 작은 역할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대본을 받아보니 비중이 커서 너무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그 이후에 ‘깜짝이야’가 연속적으로 터진 거죠.” 이후 드라마에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게 되고 영화 ‘니얼굴’ 개봉, 또 정 작가 개인 유튜브 채널을 통해서도 일상이 공유되면서 ‘정은혜’라는 이름이 알려지게 됐다.
정 작가의 일상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니얼굴’은 포털 사이트나 유튜브 등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또한, 정 작가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토포하우스에서 8월 24일부터 30일까지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만난다. 정 작가의 개인전 제목은 ‘포옹’이다.
또 다른 은혜씨를 위해
장차현실 작가는 “은혜씨가 자기 시간을 갖고 다시 자기 삶을 살게 될지 몰랐다”며 “은혜씨를 막연히 슬프고 힘든 존재로만 여겼던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존재를 인정하면서 길을 열어줬다면 이렇게 될 수도 있는데 우리가 그럴 가능성에 대해서는 문을 닫고 있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했다. “어떤 존재든 세상에 나온 이유가 있는데 자기 존재를 느끼지 못하고 사그라진다면 너무 마음이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을 했거든요. 그런데 현실은 제 삶과 은혜씨의 삶을 같이 가긴 어려웠어요. 어느 하나는 던져야겠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저의 삶을 던졌어요. 처음에는 그런 게 슬펐는데 지금은 저 자신도 새로운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장차현실 작가는 “발달장애인들이 우리 사회에 숨어있고 드러나지 않고 배제돼 있는 게 더 문제라고 생각한다”며 “그들을 세상으로 끌어낼 수 있는 기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우리 주변에 가능성이 있는 발달장애인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정 작가는 자신을 ‘작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좋다고 했다.
장차현실 : 작가라고 불러주는 게 좋아?
정은혜 : 좋아. (너 스스로 멋진 사람이 된 거 같아?) 응. 엄마도 멋져.
도재진 기자 djj1213@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