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인 신자 사목한 첫 번째 조선 사제
최 신부는 차구에서 베르뇌 신부의 지시에 따라 병자들을 방문하고, 주일과 축일 미사 때 강론을 했다. 또 어린이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대축일에는 고해성사를 집전하고 성체를 분배하는 성무를 수행했다. 이로써 최양업 신부는 중국 땅에서 중국인 신자들을 사목한 첫 번째 조선인 사제이며 선교사가 되었다. 1854년 8월 5일 제4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돼 그해 12월 27일 주교품을 받은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를 신학생 시절뿐 아니라 첫 보좌 시절 때부터 선종할 때까지 지켜보고 함께한 사제이다. 신학교 교수로, 동료 사목자로 평생을 함께했던 베르뇌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 대해 “굳건한 신심과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소중한 일로는 훌륭한 자질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됐던 유일한 조선인 사제”라고 칭송했다.(베르뇌 주교가 1861년 9월 4일 알브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편,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에게 다시 백령도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할 것을 그 해 11월에 지시했다. 입국 시기는 1851년 음력 3월 중이라고 잠정적으로 알려 왔다. 그 시기에 중국 어선을 구해 백령도로 오면 두 신부를 마중할 교우들을 보낼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페레올 주교는 최양업 신부에게 변문 국경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올 것을 지시했다.
“조선인 (최양업) 신부를 입국시켜 보려고 저는 중국 국경으로 (신자를) 보낼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최양업 신부의 발걸음을 이끄시어 그를 자기 조국에 돌아오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꽤 오랫동안 조선에 돌아오려고 노력을 많이 해 왔습니다.”(페레올 주교가 1849년 12월 30일 조선에서 바랑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압록강을 건너 조선으로
1849년 12월 말 최양업 신부는 변문에서 자신의 입국을 도울 조선 신자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메스트르 신부도 함께 변문으로 가길 원했다. 함께 조선 입국에 성공할 희망은 별로 보이지 않았으나 어떻든지 무슨 기회가 오기만 하면 그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두 신부가 변문에 도착하니 조선 신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최 신부는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입국할 방법을 조선 신자들과 궁리했다. 하지만 서양인인 메스트르 신부와 함께 국경을 통과하는 것은 현명한 판단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 1846년 병오박해와 프랑스 함선 2척의 고군산도 좌초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국경 경비가 한층 강화됐기 때문이었다. 최양업 신부는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스승 메스트르 신부를 홀로 두고 어쩔 수 없이 조선 신자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