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페레올 주교의 좌절과 유혹
1846년 2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의 조선 입국 실패는 둘만의 좌절이 아니었다. 조선대목구장 페레올 주교 자신의 실패이기도 했다. 페레올 주교는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입국에 성공하면, 조선 선교사들의 입국 경로를 ‘두만강 루트’로 정례화하려 했다. 페레올 주교는 2년 후에 조선으로 파견될 2명의 선교사도 이 루트를 통해 들어오게 하고 싶었고, 베르뇌 신부도 일정을 앞당겨 두만강을 건너게 하려 했다. 하지만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가 두만강을 건너지 못함에 따라 페레올 주교의 모든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다시 감시가 삼엄한 압록강 변문을 이용해 선교사들을 데려오는 방법뿐이었다.
좌절을 경험한 페레올 주교는 뿌리치기 힘든 달콤한 유혹에 빠진다. 힘으로 조선을 무력화시키려는 카드를 다시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는 극동대표부장 리브와 신부에게 이렇게 제안했다. “만일 신부님께서 세실 함장이나 혹은 다른 함장이 우리 동료들을 살해한 데 대한 해명을 요구하러 조선에 올 결심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인류와 종교에 큰 자산이 될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영국 해군은 떠나면서 내년 음력 3월에 다시 오겠다고 예고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좋겠는데, 좋은 위치를 점령하면 더욱 좋겠지요. 조선의 백성은 여전히 정말로 야만적인 상태에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통해 문명화되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용서받을 것입니다.”(페레올 주교가 1845년 12월 27일 한양에서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페레올 주교가 말한 영국 해군은 자신과 다블뤼ㆍ김대건 신부 그리고 조선 신자 11명이 타고 온 라파엘호가 제주도에 표착하기 3개월 전인 1845년 6월 25일 우도에 나타나 7월 15일까지 제주도 연안을 측량하고 돌아간 영국 군함 사마랑호를 말한다. 사마랑호는 이후 거문도와 다도해 일대 수심을 측량하고 다시 우도로 돌아와 7월 말께 일본으로 갔다. 이 일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해안 경비가 강화됐고, 한양으로 들어오는 모든 배를 엄격하고 세밀하게 검문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던 페레올 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곧 선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선 무력 사용을 정당화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페레올 주교는 또 1846년 9월 6일자 리브와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만약 그들(프랑스 군함)이 온다면, 우리 동료 신부님들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요구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왕에게 종교의 자유를 선언하라고 강요하기를 바랍니다. 또 다른 좋은 수단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북경의 재중국 영사의 중재를 통해서 중국 황제에게 간청하는 것입니다. 조선의 왕에게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조용히 내버려두라고 경고하도록 말이지요”라고 청했다.
페레올 주교의 이러한 의식은 비단 그만이 갖고 있던 것이 아니라 당시 서양 선교사들의 보편적인 인식이었다. ‘선교와 신앙’은 인간의 기본권이며 양심의 자유에 속하는 가치로, 이 양심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해도 된다는 집단적 지성과 제국주의적 인식이 선교사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인간 구원을 위해서라면 선교에 방해되는 원주민들을 아무런 죄의식 없이 학살해도 된다는 그릇된 인식을 하고 있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의 이러한 사조는 김대건과 최양업에게도 자연스럽게 이식됐다. 그러나 메스트르 신부와 김대건ㆍ최양업은 무력을 선교에 활용하지만, 제국주의의 궁극 목적인 정치적, 상업적 야심 때문에 선교의 순수성을 훼손하거나 복음 선포에 방해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다.
페레올 주교의 이러한 인식은 얼마 후 자신처럼 아끼던 김대건 신부를 죽음으로 내몰고 만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