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자 상봉
페레올 주교는 김대건 신부가 부제 시절 1845년 1월 입국해 선교 자금으로 사두었던 한양 소공동 돌우무골 남별궁 뒤편 우물가 초가에서 생활하면서 제3대 조선대목구장으로서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했다. 아마도 페레올 주교는 주님 성탄 대축일 즈음해서 한양에 입성했고, 12월 27일자로 편지를 쓴 것으로 보아 성탄절을 기점으로 사목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페레올 주교는 1843년 4월부터 최양업 김대건과 함께 중국 길림 소팔가자 교우촌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성사를 집전할 만큼은 어느 정도 조선말을 익혔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한양에 입성한 후 곧바로 신자들에게 성사를 거행할 수 있었다.
김대건 신부는 1845년 주님 성탄 대축일을 한양 소공동 돌우물골에서 페레올 주교와 평신도 지도자들과 함께 지낸 후 경기도 용인 은이 상뜸이로 갔다. 상뜸이는 ‘윗마을’이라는 뜻으로 그의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살고 있던 ‘은이 골배마실’을 말한다. 모자는 1836년 7월 신학생으로 선발돼 모방 신부가 있는 한양으로 떠날 때 작별한 후 10년 만에 상봉했다. 고 우르술라는 굴암 교우촌 회장으로 활동하다 1839년 기해박해 때 남편 김제준이 체포돼 순교한 후 산속 깊숙이 숨겨진 동네(隱里) 위 골배마실 교우촌으로 들어와 은수자처럼 홀로 살고 있었다. 앳된 소년에서 청년으로, 또 조선인 첫 신부가 되어 나타난 아들을 본 어머니의 심정은 어땠을까? 하느님의 아들로, 교회의 사제로 봉헌된 아들에게 엄마는 예를 갖췄고, 무릎을 뚫고 강복과 안수를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홀로 부엌으로 가서 어머니 품 같은 집에서 10년 타향살이의 피로를 녹일 수 있도록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갖고 있던 모든 것과 이웃 교우들에게 꿔 아들 신부를 먹일 음식을 정성껏 장만하면서 홀로 “천주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며 감격을 눈물을 훔쳤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주님 부활 대축일 전까지 어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양지 터골, 응다라니, 굴암 회가마골, 정쇠, 무쇠막, 산의실, 더욱골, 산골 등 용인 일대 교우촌을 사목 방문하면서 교우들에게 미사와 성사를 집전했다.
1846년 4월 부활절이 가까웠을 때 김대건 신부는 페레올 주교로부터 메스트르 신부와 최양업 부제를 입국시키기 위해 경원에 갔던 교우들이 그들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왔다며 급히 상경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곧바로 한양으로 갈 채비를 챙겼다. 이때 어머니 고 우르술라가 마지막임을 직감했는지 김 신부를 잡았다. 그러면서 “곧 주님 부활 대축일이니 미사를 드리고 떠나라”고 청했다. 김대건 신부는 1846년 4월 12일 주님 부활 대축일 미사를 봉헌하고 다음날 곧 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에 길을 나섰다. 모자는 이날 이후 더는 볼 수 없었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