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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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바나나 껍질 잘라 만든 꽃 성모님께 봉헌

참 빛 사랑 2022. 2. 23. 18:28

[미카엘의 순례일기] (55)어린 소녀의 봉헌물

▲ 한 소녀가 바나나 껍질로 꽃을 만들어 성모상 앞에 봉헌하고 있다.
 
 

아주 오래전에 존경했던 신부님께서 아프리카로 떠나셨습니다. 휴대전화가 드물던 시절이라 그 이후로는 연락이 끊겼지요. 한참 후 가톨릭평화신문을 통해 신부님의 선종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저 오래전 한국에서 만났던 기억만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뒤 친구 신부님께서도 아프리카로 교포 사목을 위해 떠나셨습니다. 5년이 기한이었지만 그곳에서 특별한 계기가 있었는지, 교포 사목의 소임이 끝난 후에는 아프리카 원주민 본당으로 옮기셨지요. 다행히도 옛날과 달리, 이제는 인터넷과 SNS 덕분에 신부님께서 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께 보고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그곳은 전기도 없는 오지였기 때문에 도시에 일을 보러 나오실 때에나 가끔 소식을 올려주셨지만요. 드문드문 올라오는 사진 속 신부님의 얼굴은 검게 그을려 거칠기 그지없었지만, 한국에 계실 때보다 훨씬 행복한 얼굴이셨습니다.

한번은 순례 도중, 오랜만에 신부님이 올린 새 소식을 보게 되었습니다. 성모상에 무언가를 봉헌하는 아이의 사진이었는데 손에 든 것의 정체를 알 수가 없었습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신부님께 연락을 드렸습니다. 알고 보니 그건 바나나 껍질을 가늘고 얇게 잘라 꽃다발처럼 만든 것이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어린 소녀는 성모님께 꽃을 봉헌하고 싶었지만, 꽃은 너무 귀하고 비쌌으므로 그 대신 바나나 껍질을 예쁘게 모아 성모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마치 자신이 가진 전부인 동전 한 닢을 봉헌했던 성경 속 과부의 이야기 같았습니다. 신부님께서는 많은 이들이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지만 사실 이곳에서 정말로 행복하다고 진심 어린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이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걸어 다니다가 바닥에 널린 깨진 유리병과 깡통에 늘 발을 다친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곳에는 본래 그런 뾰족한 물건들이 존재하지 않았지만, 서구의 문명이 들어서며 전에 없던 종류의 쓰레기가 생겨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신발을 새로 살 돈이 있는 것은 아니라며 안타까워하시는 신부님의 목소리에 저도 덩달아 가슴이 아팠습니다.

순례가 막바지에 이르러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을 때였습니다. 마침 순례자들에게 성전 뒤쪽에서 고개 숙여 기도하던 과부의 비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요. 저는 소녀가 봉헌한 바나나 껍질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맨발로 걷다가 발을 다치는 어린아이들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순례단이 그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하시기에 신부님의 SNS 주소를 알려드렸습니다. 식사 시간 내내 온통 신부님과 그 소녀의 이야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 아침, 지도 신부님과 순례자 몇 분께서 아이들의 신발을 사주고 싶다며 성의를 모아 오셨습니다. 친구 신부님과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어떤 부부는 단지 일회성이 아니라 정기적으로 그곳에 정성을 봉헌하고 싶다고 물으셨습니다. 한 번 정도는 제가 신자들의 마음을 전달할 수 있겠지만, 지속적인 도움이라면 당연히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셔야 하기에 저는 벅찬 마음으로 곧장 신부님의 연락처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형제님께서는 병에 걸려 점차 시력을 잃어가고 계셨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시력이 다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와 함께 떠난 순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떠난 순례에서 그 신부님과 소녀를 알게 된 것까지도 하느님의 뜻인 듯하다며 부부께서는 기뻐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한계 이상의 무엇을 요구하지 않으신다고 저는 믿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이 아닌가요? 부자의 어마어마한 봉헌금보다 과부의 동전 한 닢을 기꺼워하셨듯이 그 소녀가 바친 바나나 껍질 꽃다발은 그 어떤 화려한 화환보다도 당신 마음에 쏙 드셨겠지요. 그 형제자매님의 진실된 기도와 마음 또한 마찬가지로 축복하셨을 것입니다. 준 것을 돌려받으려는 마음 없이 주는 것이야말로 주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가 닮아야 할 모습일 테니까요. 신부님이, 작은 소녀가, 순례단의 부부가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간단하지만 참으로 어려운 그 사실을 자꾸만 잊고 사는 저를 반성하며, 오늘은 그 모든 이들의 행복을 온 마음으로 기도하고 싶습니다.



“주고 가져가지 않는 것, 그것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도로시 데이, 1897~1980)



김원창(미카엘, 가톨릭 성지순례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