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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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조경자 수녀의 하느님의 자취 안에서] 23. ‘말씀’이 오셨다

참 빛 사랑 2021. 12. 28. 18:30
 
 
 
 

땅이 꽁꽁 얼었다. 겨울다운 추위가 온 것이다. 매서운 추위를 지낸 땅에 농사를 지으면 해충 없이 풍작을 할 수 있다고 어르신들은 말씀하신다. 실제로 밋밋한 겨울을 지냈던 요 몇 년간은 낯선 벌레떼로부터 작물들이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올겨울은 얼마만큼 겨울다운 겨울이 될 수 있을까? 그러면서도 도심 속 음지에서 추위에 떨고 계실 많은 분을 기억하게 하는 겨울날이다.

10여 년 전 생태적 삶을 꿈꾸는 농사 소임을 받았을 때,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데에서 두려움을 느꼈었다. 물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여정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마치 광야에 놓인 느낌이었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길을 찾을 때에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침반이다. 당시 나에게 나침반은 바로 ‘말씀’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말씀’은 나에게 나침반이 되고 있다.

‘말씀’ 때문에 행복한 수도자가 되고 싶었다. 무엇을 잘하고, 무엇 때문에 행복한 수도자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말씀’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다. 지금은 ‘생태적 삶’이라는 고급스러운 말로 우리 삶을 표현하곤 하지만, 처음에는 철저히 농부로 살았기 때문에 우리 삶에 대하여 ‘사람들이 선택하지 않는 어려운 일’ 정도로 표현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신앙인이면서 농부로 살 때 필요한 지표를 갖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우리는 내적인 동인을 찾기보다, 당장 눈앞에 드러나는 문제의 쉬운 해결방법을 찾는 것에 익숙하므로 이렇게 방향을 찾고 천천히 느리게 가는 것에 답답해 하는 분들도 계셨다.

땅을 돌보며 사는 우리에게 ‘말씀’은 더욱더 씨앗처럼 다가왔다. 성장과 관계 모든 것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렌즈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씀’을 삶 안에,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감사로움을 느끼고 아름다운 것을 볼 때에도, 또는 기후위기와 코로나19와 같은 아픔에 직면할 때에도 ‘말씀’은 우리에게 길을 제시해 주었다. ‘말씀’에서 길을 찾을 때에는 조급하지 않고, 비교하지도 않으며, 다만 묵묵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을 해야 할지를 묻다가도 주님의 계획안에서 보고, 모든 의지를 내려놓게 된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말씀’을 나침반으로 삼는다지만, ‘말씀’에 귀 기울이고, ‘말씀’을 마음에 담고 살다 보면, 문득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느낀다.

마리아와 요셉을 보면 더 잘 알아볼 수 있다. 자신이 어떤 한계를 가지고 있더라도 하느님의 계획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을 믿고,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라고 따르신 두 분을 통하여 예수님은 성탄하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바람에 그치는 희망이 아니라, 하느님의 바라심을 알아차리는 지점을 발견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성탄하심은 하느님의 이 바라심이 이루어지도록 우리 삶을 내어주는 자리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세상 곳곳에서, 우리 마음 안에서….

우리 주변의 사람들과 생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말씀’이 자기 삶 안에 이루어지도록 하는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오늘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뵐 수 있다. 저 많은 생명도 ‘그 말씀’이 ‘이루어지소서’ 하고 노래하고 있지 않는가? 바로 그곳에 예수님이 오셨다. 가장 크신 분이 가장 낮고 작은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셨다. 기쁜 성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