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중에 그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기획 연재

[제8회 신앙체험수기] 가작/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

참 빛 사랑 2021. 3. 29. 21:13

유수지(디냐, 인천교구 부평4동본당)

▲ 일러스트=최단비


수업을 마치면 무거운 가방을 둘러메고 지인들이 알려준 정보를 들고 집주인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보고, 방을 직접 확인해보고, 교통편을 알아보았지만, 저의 경제적인 상황에 맞는 방을 찾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습니다. 대학원 1학년 입학을 앞두고 있었기에 학교와의 거리가 제게는 가장 큰 관건이었습니다. 석사 논문을 써야 했기에 많은 시간을 거리에 버릴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비용을 줄이자니 학교에서 멀고, 학교에서 가까우면 비용이 너무 비싸고…. 정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가슴 졸이며 눈물만 흘리는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일정한 수입이 없는 학생 신분이었기에 눈물을 머금고 방을 구하러 한 학기를 헤매어야 했습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가방을 둘러매고 방을 구하러 다니다 보니 어깨엔 가방끈 모양으로 멍이 들기도 했습니다. 매일 밤 저는 ‘도와주세요!!’ 라고 외치며 주님께 매달렸습니다. 그렇게 눈물과 기도로 하루하루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습니다.



저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늘 진로에 대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뭔가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이 있었기에 기도를 하며 저의 마음이 어디로 향하는지 돌아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가족들 모르게 매달 한 번씩 수도회에 진행하는 성소 모임에 나가면서 수도회에 입회하여 수도자가 되고자 하는 마음을 키워갔습니다.

성소 담당 수녀님과 입회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갈 즈음, 할머니께서는 병이 깊어지셔서 병원에서 집으로 오셔서 투병생활을 하셨습니다. 11개월 차이가 나는 남동생이 있던 저는 할머니를 엄마처럼 알고 자랐습니다. 조부모님과의 생활은 저의 성장기에 많은 선한 영향을 주었습니다.

반년 동안 병상에 누워계시던 할머니는 제가 수도회 행사에 잠시 간 사이 주님 곁으로 떠나셨습니다. 저를 너무나도 사랑하셨던 할머니는 제가 너무 슬퍼할까 봐 그러셨는지 떠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으시고 먼 길을 떠나셨답니다. 수녀원에서 그 소식을 듣고 택시를 타고 돌아오면서 얼마나 울었던지요. 31년을 할머니와 함께 방을 사용했기에 할머니와의 이별이 저에겐 너무나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커서 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할머니의 빈자리가 너무 커서 슬픔을 주체할 수 없었던 저는 정해진 수도회 입회를 미뤘고, 그 사이 주님은 저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가족들 모르게 로마로 서류를 보내고 기다리는 동안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길은 무엇일까?’ 하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유학을 떠나던 그해 부활절 날, 공부하러 와도 좋다는 편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님이 제게 주신 부활 선물이었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원하시는 길은 ‘수도자의 길이 아니라 공부의 길이구나!’라는 깨달음 안에 저는 2009년 2월 말에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6월 말에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로마에 도착해서 일주일 후, 두 달 동안 이탈리아의 작은 바닷가 마을인 쥴리아노바라는 곳으로 어학 공부를 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으로 따지면 강원도 속초 같은 분위기의 동네였습니다. 어학 프로그램은 한 달은 외국인 친구들과 어학 수업을 듣고, 한 달은 그 지역 가정에서 홈스테이하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학원에는 수녀님들도 많이 계셨습니다. 평신도와 수녀님들이 숙소만 다르고 함께 공부하고 식사하며 생활하는 구조였습니다.

원해서 온 유학이었지만 로마 생활은 어학 공부를 시작하고 며칠 후부터 후회가 밀려왔습니다. 문화와 언어가 다른 친구들과 또 수녀님들과 함께 생활한다는 게 만만치 않았습니다. 식생활 차이와 생각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 공부하는 스타일까지 너무나도 달랐던 우리는 많은 우여곡절을 겪어가며 어학 공부에 매진했습니다.

어학원에서의 생활 한 달 후, 전 부루나 할머니 댁으로 수녀님 세 분과 함께 가게 되었습니다. 홈스테이 프로그램은 한 집에 두 명씩 가기로 했던 건데, 가정으로 떠나기로 한 아침, 가기로 했던 집에서 급한 사정으로 신청을 취소하면서 할머니 댁에 네 명이 한꺼번에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 마음은 수녀님들과 한집에서 사는 것도 신기했고, 가정집 체험을 한다는 생각에 많은 기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한 달 동안 어학원에서 언어 수업을 받았지만 겨우 기본적인 인사만 나눌 정도였기에, 가끔 방언을 쓰시는 할머니 말씀을 처음엔 알아듣기 너무 힘들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지금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이냐고 되물었고, 가끔 오는 할머니 손녀딸 로베르타를 통해 할머니의 방언을 이해하곤 했답니다. 로베르타에게는 3살짜리 귀염둥이 딸 베네데타가 있었습니다. 저희보다 유창하게 말을 하는 그 꼬맹이는 저희에게 훌륭한 선생님 역할을 해주었답니다.

부루나 할머니는 우리를 위해 매끼 맛있는 요리를 해주셨고, 5일 장에도 데려가 주시고, 슈퍼랑 정육점, 꽃가게, 관공서 등에 데려가 이것저것 설명도 해주시고, 동네 산책도 같이 가주시고, 동네 분들에게 저희를 소개해 주셨습니다. 작은 일상을 통해 할머니와의 정이 하루하루 깊어졌고 추억들도 늘어갔습니다.

요리를 좋아하시는 우리 할머니는 본당 식복사 자매님이 아프시거나 집안일로 못 오시는 날이면, 신부님을 모시고 와서 맛있는 식사도 준비해주시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우린 신부님과의 친분도 쌓으며 언어를 늘려나갈 수 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셨던 엔요 신부님은 한국에 가본 일이 있다고 하시며,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불고기라고 하셨습니다. 전 서투를 말로 떠듬떠듬 신부님께 쥴리아노바를 떠나기 전에 한국 음식을 꼭 한번 대접하겠다는 약속을 하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아침 6시면 거실 테이블에 촛불을 켜고 앉으셔서 성무일도를 하셨습니다. 할머니는 강요하지 않으셨지만 우리는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나 할머니 곁에 앉아서 더듬더듬 성무일도를 읽고, 아침기도를 했습니다. 할머니는 정성스럽게 어디를 펼쳐서 읽어야 하는지 알려주셨고, 단어 발음과 뉘앙스도 한 번씩 잡아주셨습니다. 마지막에는 다 같이 손을 잡고 기쁜 하루를 위해 기도를 하는 것으로 마무리해주셨습니다.

그렇게 아침기도가 끝나면 우리는 역할을 나누어 찻잔과 접시를 준비하고, 모카포트에 에스프레소를 끓이고, 빵과 크래커와 잼을 준비해서 맛있게 아침 식사를 나누었습니다. 생각하는 걸 모두 다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수녀님들과 저는 아는 단어와 몸짓을 동원해가며 대화를 나누며 하하 호호 즐거운 식사를 하곤 했습니다.

쥴리아노바의 작은 성당에는 전례 봉사자가 따로 없었던지라, 슈퍼우먼 부루나 할머니는 열심히 본당을 위해 봉사를 하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성당에 가서 여기저기 기름을 채워두시고, 촛불을 켜두고, 화단에 물도 주고, 성전 청소도 하시고, 전례서도 펼쳐놓으시고, 독서 연습도 하시고, 봉헌 바구니도 준비하시고 제의도 다려서 올려놓으시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해두시곤 했습니다. 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서 이것저것 준비하다 보니 성당 식구들도 우리 4명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고, 우리는 곧 동네 유명인사가 되었답니다.

성당에 다녀와서 각자 알아서 문법책을 보면서 공부하고, 서로 물어보며 문제도 풀며 오전 시간을 보내고, 점심시간이 가까워져 오면 할머니를 도와 요리를 해서 점심을 맛있게 먹고, 식사 후에는 시에스타를 잠시 즐기고 일어나 동네 산책을 하고 오후 4시 반에 할머니를 모시고 성당에 갔습니다. 미사 후 성당 뒷정리를 하고, 봉헌금을 계수해서 금고에 넣어두고 나왔습니다. 성당을 빠져나올 때면 가끔 식사 때 뵈었던 엔요 신부님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곤 했답니다.

저녁을 먹은 후에는 집 앞 바닷가에 나가 할머니와 물장난도 치고, 파도를 느끼며 한참을 걷기도 하고, 꼬맹이들이 두고 간 장난감으로 모래성도 쌓아보며 재밌게 놀기도 하고 시원하고 맛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돌아오곤 했습니다. 돌아와서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텔레비전을 보면서 깔깔깔~ 웃으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습니다. 늘 잊지 않으셨던 할머니의 마지막 프로그램은 기도였습니다. 다 같이 모여서 오늘 하루도 무사히 재밌게 보낸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정성스럽게 기도를 드리고 할머니와의 포옹을 나누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재밌게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언어도 조금씩 늘었고 이탈리아 생활이 차차 익숙해져 갔습니다. 여러 추억이 쌓여가다 보니 어느덧 한 달의 시간이 훌쩍 흘러 로마로 다시 돌아가야 할 시간이 곁에 와있었습니다. 할머니와 헤어져 다시 로마로 돌아가던 날,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리며 할머니를 부둥켜안고 전 한동안 버스 터미널에서 발을 떼지 못했답니다.

로마에 돌아와서 저는 22개국의 친구들이 함께 모여 사는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오전에는 학교 수업을 듣고, 오후에는 학교에서 진행하는 언어 수업에 참여하며 일 년을 지냈습니다. 같은 기숙사에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생활하다 보니 어학연수 때와는 또 다른 여러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어학 수업을 받았어도 생각하는 만큼 말도 잘 안 통하고 의사 표현도 수월하지 않았는데 수업을 듣고 시험을 봐야 하니 일 년 동안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는지 모릅니다. 첫 시험을 치르던 날 교수님이셨던 수녀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너 얼굴이 모차렐라 치즈 같구나!!” 라고 하시며 저를 다독여 주셨답니다. 지금도 그때 어떻게 시험을 치르고 나왔는지 기억이 잘 나질 않는답니다.

기숙사에는 아침 7시 반에 미사가 있었고, 미사 30분 전에는 성무일도가 있었습니다. 미사 후에 아침을 먹고 학교에 다녀와서 각자 오후 일정을 소화하고 저녁 6시 반에 있는 성무일도를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고, 알아서 공부하다 잠자리에 드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사실, 이런 루틴한 생활을 못 견뎌 하는 친구들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아침, 저녁기도나 미사에 안 나오는 친구들도 있었고, 중간에 그만두고 본국으로 돌아간 친구들도 있었답니다.

기숙사에는 한 가지씩 일을 맡아서 일 년 동안 소임을 해야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공동체실 관리, 도서 관리, 세탁실 관리, 미사 준비, 꽃꽂이 봉사 등등 여러 가지가 있었습니다. 원장 신부님이 준비해놓으신 소임 리스트에 이름을 적는 거였는데, 미사 준비와 제의방 정리에는 친구들이 이름을 잘 안 적었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 하고, 뒷마무리하느라 아침밥도 늦게 먹어야 하니까 인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유학 첫해는 아무것도 모르고 ‘신입생이니까 막내가 해야 하나 보다’하고 미사 준비와 성당정리 소임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사실 며칠 안 되어 ‘내가 왜 여기에다 이름을 적었을까?’ 하며 후회를 했습니다. 전례 시기에 맞게 제의와 영대를 준비하는 것도 헷갈려서 허둥대고 전례 책자를 엉뚱하게 펼쳐놔서 신부님께서 미사 중에 다시 펴기도 했답니다. 또 성작수건을 빨아서 널고 다림질해서 넣어놓아야 했으니 시험 기간에는 은근히 짜증이 났던 것도 사실입니다. 내년에는 이 소임을 하지 말아야지 했는데, 그냥 올해도 네가 하는 게 좋겠다는 무언의 압박 속에 전 3년을 이 소임을 맡았었답니다.

한국과는 다르게 로마에서는 9월에 학기가 시작해서 6월에 학기가 끝납니다. 성탄 방학 2주일, 부활 방학 2주일이 있는 게 방학의 전부였습니다. 7월부터 학기가 시작하는 9월까지는 기숙사를 비워야 했습니다. 알아서 숙박을 해결해야 하니 막막하기 그지없었답니다. 양로원이나 병원으로 봉사를 떠나는 친구, 수도회에 머물기를 청해서 떠나는 친구, 본국에 다녀온다고 가는 친구 등등 두 달간의 시간을 알아서 해결하는 우리에겐 여름방학이 큰 숙제였습니다.

막막하기는 저도 마찬가지였기에, 로마에서의 첫 방학이 슬금슬금 다가오는 시기에 조심스럽게 쥴리아노바 부루나 할머니 손녀딸 로베르타에게 메일을 보냈습니다. 그때도 할머니와 전화 통화를 하며 설명할 정도의 언어 능력이 안 되었기에, 지금의 내 상황이 이런데 두 달간 그곳에 가서 머물러도 되겠느냐며 할머니 의사를 여쭙고 답장을 달라고 간절한 마음을 담아 더듬더듬 적어서 보냈습니다. 메일을 보낸 다음 날 바로 답장이 왔습니다. 언제든지 환영이라고, 우리 가족들은 언제나 너를 기다린다고! 그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답니다.

홈스테이의 인연으로 저는 매해 방학을 할머니 댁에서 보낼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를 도와 청소와 설거지도 하고, 장도 대신 봐 드리고, 할머니 건강을 생각해서 함께 바닷가 산책도 하고, 강아지 밥도 주고, 옆집 마리아 할머니 댁에 놀러 가서 말동무도 해드리고, 마리아 할머니 며느리인 미렐라에게 한국 성가와 음악도 들려주기도 했습니다.

또 동네 대소사에 함께 참가해서 사진도 찍어드리고, 다시 로마로 돌아올 때는 모든 사진을 인화해서 동네 분들에게 나눠드리곤 했습니다. 가족도 이렇게 품기 힘들 텐데 저 멀리서 온 외국인 여학생을 위해 매해 잠자리와 먹을 걸 해결해주신 할머니를 위해 기쁘게 나의 노동력을 제공해 드려야겠다라는 마음이 제 안에 자리 잡았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흐르니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되었기에 방학 때마다 할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늘어갔습니다. 할머니와 생활 안에 늘 빠지지 않는 일과는 역시 미사 참여와 기도였습니다, 방학 때도 새벽에 일어나야 해서 가끔은 늑장을 부리기도 했지만, 할머니는 묵묵히 기다려주셨습니다. 오후엔 늘 할머니와 성당에 함께 갔고, 성당 여기저기를 정리하고 돌아왔으며, 기도로 하루를 마무리했습니다. 방학이 마무리되고 다시 로마로 돌아올 때면 언제나 시골 버스터미널은 눈물바다를 이루곤 했답니다.

언어가 늘어가니 하루하루 이탈리아 생활이 익숙해지고 재밌어졌습니다. 수업 시간에 필기도 할 수 있게 되고, 과제도 척척 해내며 점점 공부의 맛에 빠져들어 갔습니다. 그렇게 재밌게 학교생활을 하며 학부 3학년을 달려가던 중반 어느 날 저에게 큰 어려움의 시간이 닥쳐왔습니다.

이탈리아도 재정이 어려워서 외국인 학생에 대한 지원을 줄이게 되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기숙사도 문을 닫으니 더 이상 머무를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인들이 대부분인 우리 기숙사는 많은 지원을 받고 있었기에 이러한 소식은 학생들뿐만 아니라 직원분들을 포함한 모든 기숙사 식구 모두에게 충격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원장 신부님께서 주말에 기숙사 회의를 소집하셔서 상황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제 내년부터는 그 어떤 장학금도 줄 수 없다고 결정이 되었으니, 학부를 마치기 전에 더 공부할지, 본국으로 돌아갈지 알아서 결정하라는 소식이었습니다. 공부를 지속하게 된다면 경제적인 모든 걸 혼자 해결해야 하는 상황이 펼쳐지게 되었습니다. 제일 큰 문제는 체류증이었습니다. 정확한 거주지가 없으면 발급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소식은 모든 걸 내려놓고 공부하러 온 저에겐 너무나도 슬픈 소식이었습니다. 진로를 고민하던 중 학비와 기숙사비 장학금이 보장되었기에 다 내려놓고 공부하러 나올 수 있었던 것이 사실인데, 이제 아무것도 지원받을 수 없다니요. 집에 경제적인 도움을 청할 상황도 아니었고, 제가 가진 돈으로는 남은 2년을 살아내기에 턱없이 부족했기에 앞이 막막했습니다. 당장 제 앞에 떨어진 불덩어리 걱정에 전 밤에 잠도 잘 이루지 못했습니다. 매일 밤 울면서 기숙사 성당에 앉아서 묵주를 손에 쥐고 십자고상을 올려다보며 기도를 했습니다. 학업을 마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공부를 무사히 마치게 해주시면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겠다고….


학부가 마무리되어 갈 때까지 저의 미래는 불투명했습니다. 근심 걱정에 저는 하루하루 말라갔습니다. 한국에서 전화라도 오는 날이면, 저의 상황과 감정을 숨긴 채 건강하게 기쁘게 잘 지내고 있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고 말씀드리곤 했습니다. 그 시점 대부분의 친구들은 학업을 포기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습니다. 하지만 전 포기를 할 수 없었습니다. 어려운 결심을 하고 여기에 온 이상 전 어떻게 해서든 공부를 마치고 가야겠다는 열망이 가득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셨습니다. 주님은 제게 학비와 기숙사비를 해결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주셨습니다. 저의 어려운 사정을 들으신 분들이 작은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주셨습니다. 제 마음이 다칠까 봐 직접 저에게 비용을 주신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저의 계좌로 입금을 해주시고 응원의 글을 적어 메일로 보내주셨습니다. 남은 시간을 다 해결할 수는 있는 금액은 아니었지만, 제게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은 저의 목마름을 충분히 적셔줄 수 있었습니다.
 

새 학기가 시작될 즈음, 3년 동안 생활했던 기숙사는 문을 닫았고, 전 서둘러 이삿짐을 꾸려 나와 학교 주변에 수녀님들이 운영하시는 기숙사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기숙사에 학교 교수님이 살고 계셨습니다. 교수님은 학생 담당 수녀님께 저의 사정을 말씀드려주셨고, 전 매달 기숙사비를 조금씩 할인받는 은총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새벽 6시 반에 수녀님들과 함께 성무일도를 바치고, 미사를 드리고, 아침을 먹고 학교에 다녀와서 점심을 간단하게 먹고, 다시 학교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적이며 논문을 작성하고, 집에 돌아와 수녀님들과 함께 저녁 성무일도를 바치고 저녁을 먹고, 씻고 공부하다가 잠자리에 드는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여러 가지로 어려운 시간 안에 제가 매달릴 수 있는 건 기도밖에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어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저는 수도원 미사와 기도에 빠지지 않고 참여했습니다. 잠들기 전 기숙사 성당에 가서 묵주기도를 드리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기숙사에 많은 여학생이 있었지만, 새벽에 기도 나오고 미사에 참여하는 학생은 너밖에 없다며 수녀님들은 저를 많이 예뻐해 주셨습니다.
 

수녀원에 살면서 받은 사랑 중 하나를 소개해 말씀드리자면, 석사 논문을 교정할 때의 일이었습니다. 은퇴하시고 소일로 시간을 보내시는 할머니 수녀님 두 분이 저의 석사 논문 수정을 도와주셨습니다. 수도회에서 오랜 시간 강의를 통해 수녀님들을 양성하셨던 두 분은 제 논문 수정을 너무나도 기쁘게 도와주셨답니다.
 

수녀님들은 틈틈이 저를 불러서 차와 과자를 나누어 주시며 수정, 보완할 부분과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알려주시곤 했습니다. 연필로 인쇄물에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눌러쓰신 수녀님들의 글씨에도 많은 사랑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도움받을 사람이 없으면 논문 교정도 비용을 내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에 수녀님들의 도움은 가난한 유학생이었던 저에게 너무나도 커다란 선물이었습니다. 기숙사 수녀님들의 사랑 안에 전 무사히 논물을 제출하고 발표를 할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은 학업 중간중간 틈틈이 주어진 아르바이트를 하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갔습니다.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마음고생도 많았지만, 이 또한 차근차근 적응해 나갈 수 있도록 주님께서 이끌어주셨습니다. 아르바이트와 점심값을 아껴가며 어렵게 모은 돈으로 사고 싶었던 사전도 구입하고, 논문 준비에 필요한 서적들도 구입하며 얼마나 행복해했었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내고 공부하면서 전 무사히 논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습니다. 어려운 시간 잘 이겨냈다는 생각에 마지막 시험을 마치고 나오는 길에는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종합시험을 마치고 돌아오니 수녀님들께서는 축하 파티를 열어주시며 무사히 공부를 마친 기쁨을 나눌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전 그날 수녀님들과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한국 음식 중 잡채를 만들어 드렸습니다. 수녀님들께서 이 음식의 이름이 무어냐고 물으셔서 전 무지개 스파게티라고 알려드렸습니다. 이름만큼 예쁘고 맛있는 음식이라고 수녀님들께서 칭찬해주시고, 친구들도 좋아했던 기억이 납니다.

▲ 일러스트=최단비


수도회에 입회하고자 했던 저에게 주님은 수도자의 길보다는 공부가 더 적합했던지 학업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이는 모든 걸 내려놓고 떠날 수 있는 용기라는 선물을 주님이 제게 주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휴가를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문득 제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며들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시간이 주님이 다 계획하고 준비하셨던구나, 주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이런 시간을 선물로 주셨구나’ 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을 정리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또한 쥴리아노바 부루나 할머니와의 만남도 주님의 큰 선물이었습니다. 한 가정에서 홈스테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전 할머니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할머니와 함께 보내는 시간을 갖게 해주셔서 아침기도, 미사, 저녁기도 참여가 너무나 익숙하고 자연스러워졌었기에 기숙사에서의 미사와 기도 참여 또한 내 생활의 일부가 될 수 있었고, 할머니 댁에서 수녀님들과 함께 살아본 덕에 두 번째 기숙사에서 수녀님들과의 생활도 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할머니를 따라 성당에 가서 미사 전례를 준비하면서 배운 것들로 기숙사 성당 소임도 어렵지 않게 해낼 수 있었으며, 할머니 댁에서 매해 방학을 무사히 보내면서 외국인 여학생을 외면치 않으시고 사랑으로 돌보아주신 쥴리아노바 식구들과 지인들을 통해 나도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말고 배려해주고 도와주어야겠다!’ 라는 마음을 키워나갈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문제를 제게 주신 것도 또한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장학금을 받고 생활을 했다면 전 기숙사와 학교만 오가며 생활했을 테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학교 밖 생활은 전혀 모른 채 5년이라는 시간을 보내다 왔을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로, 기숙사에 행정적인 일을 봐주시는 분이 계셨으니 제 손으로 체류증을 만들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녀님들과 함께 살던 기숙사에서는 아침과 저녁만 나왔기에 점심은 제가 해결해야 했습니다, 점심 식사비를 줄이고, 먹고 싶은 거, 사고 싶었던 걸 참으며 아끼고 아끼며 생활해본 덕분에 돈 쓸 일이 생길 때면 한 번 더 따져보고 이게 정말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인가 생각해보는 버릇을 갖게 해주셨고, 생각 없이 지불하던 적은 돈들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셨습니다. 제게 도움을 주셨던 많은 분들을 위해 저는 늘 기도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양한 나라의 친구들을 만난 것도 제게는 큰 선물입니다. 문화의 차이를 이해해야 한다는 걸 이론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만나서 생활한다는 건 많은 어려움이 있음을, 생각과 행동에는 많은 괴리감이 있다는 걸 친구들과 수녀님들과의 생활을 통해 몸소 체험하게 해주셨습니다. 이는 문화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나와의 다름을 인정하는 폭을 넓혀 주었습니다.
 

주님의 은총 덕분에 현재 저는 교회 안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많이 부족하지만 늘 배워가는 마음으로 제게 주어진 일을 성실히 소화해내고 있답니다. 같이 일하는 너그럽고 이해심 많으신 신부님들과 수녀님, 직원들도 주님이 제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부에만 매달려 있었던지라 한국에 돌아와서 한동안은 적응이 잘 안 되었지만, 차차 일에 익숙해지고 웃음을 잃지 않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생활할 수 있도록 제게 많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제게 주어진 이 모든 시간이, 저를 너무나도 사랑하시는 주님께서 돈을 주고도 할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을 제게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도와 미사 참여로 기쁨을 찾으시고 사랑을 나눠주시는 할머니와의 만남을 통해 기쁘게 일하는 마음과 배려하는 마음, 늘 기도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셨고, 경제적인 어려움의 시간을 통해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다양한 친구와 수녀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해의 폭을 넓혀 주셨고 또한 다시 직장에 다니면서 사회생활의 소중함을 알고 조금 더 겸손하고 진실하게 사람들을 대하는 방법과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임하는 마음을 갖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께 이렇게 많은 선물을 제게 주셨으니 저는 참으로 복된 사람입니다!

 

“주님 안에서 늘 기뻐하십시오.”(필리 4, 4)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루카 11, 9)
 

저의 방과 사무실 책상 곳곳에 두 말씀을 적어놓고 늘 마음속에 새기고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도를 주님께서 들어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하루하루 기쁘게 열심히 지내고자 노력하면, 주님은 제가 청한 모든 걸 주실 것입니다. 진솔한 만남과 다양한 시간을 통해 몸소 주님의 사랑을 느끼고 깨닫게 해주신 주님께 찬미를 드리며, 부족한 제가 어려운 시간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소중한 체험을 통해 주님의 크나큰 사랑을 알게 해주시고, 그 사랑을 베풀도록 이끌어주시는 주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나약한 저를 깨우쳐 주시고 주님의 사랑을 깨닫게 해주신 주님 감사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아멘!





유수지(디냐, 인천교구 부평4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