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 에드먼드 캠피언
16세기의 잉글랜드는 모호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고 있었다. 1534년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는 자신의 재혼에 반대하는 교황청에 분노하여 잉글랜드 교회를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한 뒤 독립시켰다. 그의 아들 에드워드 6세도 선왕의 정책을 계승했다. 그러나 어린 나이로 에드워드 6세가 요절하면서 상황은 다시 급변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6세의 이복 누나인 메리 1세가 여왕으로 추대되면서 잉글랜드는 다시 로마 가톨릭의 나라가 됐고, 잉글랜드의 새로운 교회(영국 국교회 혹은 잉글랜드 성공회)는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다.
메리 여왕이 약 5년간 재위하다가 1558년 세상을 떠난 후 엘리자베스 1세가 여왕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그는 자신을 잉글랜드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했고, 잉글랜드 백성들은 다시 영국 국교회의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처럼 가톨릭과 영국 국교회라는 두 개의 종교가 양립하면서 때로는 한 쪽이 다른 한쪽을 박해하는 혼란스러운 시대 상황이 당시 잉글랜드의 모습이었다.
에드먼드 캠피언은 이렇게 급변하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1540년 1월 24일 잉글랜드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였던 캠피언은 17세에 옥스퍼드 대학교 세인트존스 칼리지의 주니어 펠로우(Junior fellow)로 선발되면서 많은 사람의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1560년 20세에 학사 학위를 취득함과 동시에 엘리자베스 1세 여왕에 대한 수위권 선서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그는 1566년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의 옥스퍼드 대학 공식 방문 환영 인사로 선정되었고, 여왕 앞에서 토론을 진행하는 사회자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이때 몇몇 인사들을 통해 캠피언이 여왕의 미래 남편감이라는 얘기가 세간에 나돌기도 하였다.
그러나 장래가 촉망되던 캠피언은 영국 국교회의 부제가 되면서 신앙의 정통성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는 주위 사람들에게 이런 고민을 숨기지 않았고, 사람들은 그가 교황주의자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했다. 주변에서는 그에게 성공회 신앙을 재확인하는 선언을 하도록 압박을 가했지만, 그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이 자신의 직무일 뿐 누구도 자신에게 신앙을 강요할 수는 없다며 이를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직책에서 물러난 뒤 아일랜드로 건너가 지냈다.
그러던 중 1570년 비오 5세(재위 1566~1572) 교황이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을 파문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에 화가 난 여왕은 가톨릭 주교들을 자리에서 내쫓고 프로테스탄트 기도서를 출간하였으며 백성들의 성사생활을 금지시켰다. 1572년 캠피언이 아일랜드에서 머물고 있다는 소문이 잉글랜드까지 퍼졌다. 결국, 아일랜드 더블린에서는 의심스러운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수색이 시작되었고, 캠피언은 몸을 피하며 여기저기로 숨어다녀야 하였다. 결국 그는 프랑스 북부 두에(Douai)로 건너가 공부를 계속하였고, 1573년 무사히 학위를 받았다.
그후 ‘만약 하느님께서 원하신다면 예수회에 입회하고 싶다’는 뜻을 품고 로마로 갔다. 그 해에 캠피언은 오스트리아 관구 소속으로 예수회에 입회하였고, 주로 프라하에 머물렀다. 그는 1574년 9월부터 프라하에 있는 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임명되어 가르쳤다. 자신의 양성 과정도 5년 만에 마치게 되면서 1578년 9월 8일 사제품을 받고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그리고 그는 1580년 로마에서 부를 때까지 줄곧 교육에 헌신하였다. 로마에서는 에드먼드 캠피언 신부와 로버트 파슨스 신부, 랄프 에머슨 수사를 잉글랜드로 파견하기로 하였고, 이들은 1580년 6월 16일 잉글랜드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이 예수회원들이 우선적으로 했던 일은 자신들이 잉글랜드에 온 이유가 정치적인 목적이 아니라 종교적인 목적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천명하는 것이었다. 이 부분을 명확히 해두지 않으면, 만약 체포될 경우 제대로 된 심문의 기회를 통해 자신들이 이곳에 온 이유를 밝혀보지도 못한 채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이에 캠피언은 그 유명한 「캠피언의 선언(Campion’s brag)」이라는 글을 남겼다. 그는 이 글에서 자신이 예수회 사제이며, 잉글랜드의 통치권 아래 복음을 전하고 성사를 집행하기 위해서 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 글은 사본으로 만들어져 빠르게 다른 도시로 퍼져나갔다. 원래는 체포될 경우를 대비해 만들어놓은 것이지만, 캠피언이 수행하고 있는 사명의 정당성을 밝혀주는 글로 알려지게 되면서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속한 신생 수도회인 예수회는 성 도미니코회나 성 베네딕도회와는 달리, 영국의 개신교도들에게 낯설고 이질적인 수도회였다. 자연스레 여기저기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였다. 예를 들어 예수회 창립자가 스페인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회원들은 스페인과 특별한 협력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이들은 영국의 여왕을 살해하려는 집단이고, 영국이 혼란 상태에 빠지면 스페인 펠리페 2세 국왕이 영국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식의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캠피언과 파슨스는 이러한 소문에 개의치 않고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해 미사와 성사를 집전하였다. 보통 밤에 고해성사와 면담을 했고, 새벽 무렵이 되면 미사를 봉헌하는 식이었다. 될 수 있으면 한 집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머물렀는데 만약 추적의 기미가 보이면 곧바로 다른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많은 가톨릭 신자들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특히 영국이 아닌 대륙에서 공부하였다는 점과 로마로부터 파견을 받았다는 점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굉장한 존경심을 갖고 예수회원들을 대하였다.
물론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이리저리 이동하며 다녀야 하는 삶은 결코 쉽지 않았다. 캠피언은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묘사하였다. “내가 이단자들의 손에서 그리 오래 벗어나 있지는 못할 것이다. 적들은 너무나 많은 눈과 입, 감시자와 술책을 갖고 있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매우 우스꽝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니고, 이름도 자주 바꾼다. 가끔은 내가 이미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알리는 글들도 읽게 된다. … 그리고 협박성 포고문은 매일 올라오고 있다. … 나의 안전을 위해, 신자들이 자신들의 안전마저 포기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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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학준 신부 |
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
마지막 순간에도 죽음 선고한 여왕 위해 기도
캠피언은 가톨릭 신앙을 더 적극적으로 옹호하기 위해 「열 가지 이유(Ten Reasons)」라는 책자를 펴냈다. 그 내용은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①모든 이단은 입맛에 따라 성경 말씀을 자의적으로 뽑아서 사용한다. ②어떤 경우에는 성경의 분명한 내용마저 왜곡해버린다. ③프로테스탄트들은 보이는 교회를 거부함으로써 어떠한 교회의 존재도 사실상 거부하고 있다. ④프로테스탄트들은 처음 네 차례의 공의회를 존중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다. ⑤ㆍ⑥ 프로테스탄트들은 교부들을 무시해버린다. ⑦교회의 역사는 계속 이어지고 있다. ⑧츠빙글리와 루터, 칼뱅의 글들은 상당히 모욕적인 언사로 가득 차 있다. ⑨프로테스탄트들은 논쟁할 때 의미 없는 속임수들을 많이 쓴다. ⑩다양하면서도 많은 수의 가톨릭 증거자들은 그 자체로 매우 인상적이다.
캠피언은 노퍽(Norfolk)으로 가는 도중에 지인이 사는 라이포드(Lyford)에도 꼭 들르고 싶어 하였다. 그는 그곳에서 아주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행동하면서 눈에 띄지 않으려 조심하였지만, 엘리엇과 젠킨스라는 사람들의 밀고로 1581년 7월 17일 결국 붙잡히고 말았다. 그가 잉글랜드에 들어온 지 불과 1년이 조금 지난 시점이었다.
체포된 그는 ‘선동적인 예수회원 캠피언’이라는 문구가 붙여진 모자를 쓴 채 런던 시내 곳곳으로 끌려다닌 후 런던탑에 갇혔다. 그는 레스터 하우스(Leicester House)로 잠시 끌려가 엘리자베스 1세 여왕 앞에서 심문을 받기도 하였다. 심문을 지켜보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캠피언이 자신을 여왕으로 인정하는지 안 하는지를 직접 묻기도 하였다.
캠피언은 엘리자베스 여왕을 합법적인 통치자로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 역시 여왕의 통치권 아래 순명하여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답변하였다. 여왕은 그렇다면 왜 교황이 자신을 파문한 것이냐고 재차 물었고, 캠피언은 이 문제가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의견이 엇갈려 있다고 답하였다.
사실 심문자들 역시 한때 자신들의 동료였으며 뛰어난 인재인 캠피언을 잃고 싶지 않았고, 될 수 있는 대로 그가 가톨릭 신앙을 포기하고 자신들의 곁으로 와주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신앙에 대해서 별다른 열정이 없던 그들이 캠피언의 신앙심을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캠피언의 확고한 태도를 재확인하면서, 그들은 이 문제를 단순히 종교적인 영역의 문제로 국한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다루고자 했고, 그에 대한 심문은 그를 반역죄로 몰아가는 분위기였다.
아무리 심문해도 별다른 소득이 없자, 캠피언을 사형시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졌다. 당시 잉글랜드 법에 따르면, 사제 직분을 수행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한 가지 이유만으로 캠피언을 사형에 처한다면 나라 안팎에서 적지 않은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쉽게 결정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던 중 법원에서 최종적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지면서 그에 대한 오랜 심문은 마침내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캠피언의 마지막 변론은 이러하였다.
“우리는 전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우리가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이유가 궁색하다는 것은 오히려 우리의 무죄를 말해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톨릭을 믿는 것이 반역을 행하는 것이라면,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습니다. 그것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누구 못지않게 여왕님께 충성스런 백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우리를 비난한다면 그것은 당신들의 모든 조상님, 곧 돌아가신 모든 사제와 주교들뿐만 아니라 선왕들을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들은 한때 잉글랜드의 영광이었지만 교황의 자녀이기도 했습니다. 당신들이 반역이라는 끔찍한 이름으로 매도해버린 우리의 가르침이 그분들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이런 이유 때문에 타락한 후손들이 우리를 비난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오히려 이를 기쁨이자 영광으로 삼겠습니다.”
사형 판결을 받은 이후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약 11일 동안 캠피언에겐 족쇄가 채워졌다. 여동생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그를 방문하러 오기도 하였고, 그를 고발했던 조지 엘리엇도 찾아왔다. 캠피언은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애초에 고발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는 엘리엇에게 “참회와 더불어 고해성사를 보라”고 권하기도 했다. 캠피언은 마지막 며칠 동안 온전히 죽음을 준비하였다. 감옥에서도 고행하고 단식하였으며, 이틀 동안 잠도 자지 않고 무릎을 꿇은 채 기도와 묵상에 전념하였다.
1581년 12월 1일 사형 집행이 예정된 런던의 타이번(Tyburn)으로 많은 군중이 몰려들었고, 캠피언은 그들을 향해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고 좋은 가톨릭 신자로 만들어주시길 빕니다”라고 말하였다. 말 두 마리가 준비되었다. 한 말에는 캠피언이 다른 말에는 랄프 셔윈과 동료 예수회원 알렉산더 브라이언트가 묶인 채로 진흙과 빗속을 헤치며 천천히 끌려갔다. 교수대에 도착하자 캠피언은 그 밑에 세워진 수레에 올라섰고 진흙과 먼지로 범벅이 된 그의 목에 밧줄이 걸렸다. 그는 교수대 위에서 큰 소리로 배심원들을 용서하였고, 심문 중에 혹시 자신이 누설했을지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용서를 청하였으며, 자신의 가방에서 나왔다고 하는 책을 절대 소유한 적이 없다고 밝혔다. 죽기 전에 여왕께 용서를 청해야 한다는 관리들의 요구에, 자신은 여왕을 모욕한 적이 없기에 결백하다고 하면서 오히려 여왕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가 기도를 마치자 사형 집행이 시작되었다. 그가 올라서 있던 수레가 치워지면서 목에 걸린 밧줄이 그의 목을 강하게 조였다. 그는 의식을 잃을 때까지 교수대에 매달려 있었고, 사형집행인은 그의 사지를 절단한 뒤 당시의 관례대로 처리하였다.
가톨릭 신앙을 증거하며 목숨을 바친 에드먼드 캠피언은 1886년 12월 9일 레오 13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1970년 10월 25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잉글랜드와 웨일즈의 동료 순교자 39명과 함께 시성되었다. 그의 축일은 12월 1일이다.
예수회, 서강대 인성교육센터 교수
[예수회 성인들의 생애와 영성] 성 에드먼드 캠피언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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