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녕하세요? 건강하게 지내고 계시죠? 신 선생님은 어떻게 처음에 입교하게 되셨나요?
(웃음) 제가 하느님을 알게 되는 과정은 조금 길 것 같네요. 저는 고향이 거창인데 그곳에는 100년이 다된 성당이 있었습니다. 제가 고등학교 1학년에 고향을 떠날 때까지 한 번도 성당에 간 기억이 없는 것을 보면 그쪽으로는 별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3학년 때 등단하고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작가로서의 길이 열린 셈인데, 생각하지 못한 어려움에 부딪히셨죠.
네, 사실 전 그때 이제 꽃길만이 내 앞에 있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모든 것은 바뀌기 시작했어요. 결혼하고 아이를 셋이나 낳았어요. 셋째 아이가 돌이 지난 후에 남편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때부터 남편은 중환자실 생활을 시작했어요. 그때가 1977년이었죠.
▶병원 생활을 하다 보면 병간호하는 분도 상당히 힘든데요.
중환자실은 정말 비참했어요. 밤사이에 사망하는 사람들도 많고, 큰 수술을 하고 밤새 아파 앓는 소리를 내는 사람이 많았어요. 중환자실은 하루 두 번밖에 면회가 안 되지만 사람들은 종일 중환자실 앞을 지키며 연신 까치발로 중환자실을 들여다보곤 했어요. 그런데 중환자실에는 사기꾼이 들끓었어요. 굿을 하고 안수기도를 받고 별일을 다 했고 돈만 빼앗겼어요. 그때 친구 어머니가 병원 앞에 성당이 있으니 답답하면 가보라고 했을 때 제가 물었어요.
“거긴 얼마에요?”
“아니야 돈 안 받아, 그냥 가보면 돼.”
이 말을 나는 그냥 흘려듣고 며칠 후 길을 걷다가 그곳이 혜화동성당이라는 걸 알았어요. 그동안에는 그렇게 오가도 안 보였는데, 남편이 입원한 병원은 성당 근처의 고려대 전신 우석병원이었거든요.
▶우연히 성당을 가보시곤 어떻게 하셨어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성당으로 들어갔지요. 놀랍게도 첫눈에 들어온 것은 어린아이를 안은 여자 조각상이었어요. 나중에 성모상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젖먹이가 보고 싶었던 저는 성모상 앞에 계단을 올라갔는데 2층은 성당이었어요. 마침 문이 조금 열려있어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었어요. 전 살금살금 다가가 맨 뒷줄에 가만히 앉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어요. 저 앞에 벽에 걸린 예수님이 고개를 들어 저에게 말했어요.
“그래! 다 안다, 그래, 다 안다.”
분명히 제 마음속에 나오는 소리를 저는 똑똑히 들었어요. 그때 전 가슴이 터질 것 같았지만 내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거의 미치는 순간까지 가 있었어요. 지나가는 누구라도 붙잡고 울고 싶었으니까요. 그러나 내 비참한 상황과 갈가리 찢어진 마음을 누구에게도 입 열지 못한 그런 순간에 “아니 다 안다고? 두 번씩이나….” 전 그만 통곡하고 말았어요. 내 본심을 잘 아시는 분이 예수라는 그 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울음은 내 힘으로 그치지 않았어요.
그다음 날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 아침 면회를 끝내고 택시 타고 집으로 갔어요. 황급히 현관에 들어서면서 아이들을 부르니 안방에서 시어머니와 아이 셋이 “엄마!”하고 나오는데 전 정신이상이 생길 만큼 괴로운 광경을 목격했어요.
아이 셋이 모두 수두에 걸려 온몸이 검은 딱지와 흉터로 뒤범벅되었어요. 저는 거의 미치기 직전이었습니다. 신발도 못 벗고 방으로 들어가 아이 셋을 끌어안고 뒹굴고 한참 울다가 지쳐서 잠시 잠이 들었어요. 잠결인지 생시인지 모르지만 분명하게 혜화동성당에서 보았던 그 성모님이 나를 안고 하늘로 오르면서 미소를 띠셨어요. 다음날 남편은 의식을 찾았고 일반병실로 옮기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어요. 전 감동했고 이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허수아비 앞에서도 무릎을 꿇고 싶은 마음이 일어났어요. 그것이 성심이 아닐까요? 병원 옆 성북동성당 주임 신부님이신 박귀훈 신부님이 병실에 자주 오셨어요. 1977년 11월 11일 11시 퇴원하는 날 성북동 성당에서 저희 부부는 세례를 받았어요.
<계속>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위원회 부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