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페레올 신부 입국로 |
중국 전역을 가로지르다
페레올 신부는 1840년 3월 6일 마카오에서 배를 타고 출발해 3~4일 뒤 툼쿠 인근을 통과한 다음 해적을 피해 산두항에 12일간 정박했다. 이후 36일간 험난한 항해 끝에 1840년 4월 11일 복건에 도착했다. 그는 400여 명의 신자가 있는 복건 해안가 교우촌에서 3일간 머문 후 그곳에서 하루 길인 장주부로 갔다. 장주부에는 도미니코회 중국인 신부가 사목하고 있었다. 페레올 신부는 그의 도움으로 산서로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경로를 강서로 가지로 수정했다.
페레올 신부는 1840년 4월 29일 장주부를 출발해 17일간 걸어서 5월 15일 강서대목구장 라리브 신부의 거처에 도착했다. 라리브(Laribe) 신부는 1832년 12월에 초대 조선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마카오에서 출발해 복건에 도착했던 프랑스 라자로회 선교사이다. 페레올 신부는 강서대목구 중심지인 남창부(南昌府)에서 이틀간 머물면서 조선 선교지에 대한 초대 대목구장 브뤼기에르 주교의 애정과 열정을 라리브 신부에게 자세히 들었을 것이다.
페레올 신부는 라리브 신부가 마련해 준 배를 타고 파양호를 거쳐 수로를 따라 호북성 무창부(武昌府)로 갔다. 6월 6일 무창부에 도착한 그는 한양부(漢陽府)에 있는 산서대목구장 겸 남경교구장 서리 드 베시 주교를 찾아갔다. 베시 주교의 도움으로 4일간 휴식을 취한 그는 산서로 가서 살베티 주교에게 도움을 구하는 계획을 포기하고 호북에서 하남, 산동, 직예를 가로질러 서만자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페레올 신부는 한 달여 여행 끝에 1840년 7월 10일 서만자에 도착했다. 이렇게 페레올 신부는 마카오에서 출발한 지 4개월 만에 중국을 종단해 중간 기착지인 서만자에 안착한 것이다.
“모든 일을 섭리하시는 주님께서 선교사들을 특별히 보살펴 주신다는 말은 옳은 말입니다. 중국말도 못하고 중국인의 생김새와 완전히 다르게 생긴 저는 어떤 작은 사고도 없이 중국 전역을 가로질렀습니다. 복건성을 빠져나온 후로 누구도 저희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여행 중에 만리장성에 있는 관문 외에 어떤 관문도 보지 못했습니다.”(페레올 신부가 1840년 8월 14일 서만자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다
페레올 신부는 서만자에서 한 달 보름간 체류하면서 휴식을 취했다. 그는 우기가 끝나자 제2대 조선대목구장 앵베르 주교가 서만자에 도착한 조선 선교사에게 남긴 편지를 읽고 주교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8월 25일 파리외방전교회가 관할하고 있는 만주대목구 요동으로 길을 나섰다. 편지에는 △조선 국경에서 멀지 않고 배들이 자주 드나드는 양워우라는 항구에 집 한 채를 매입할 것 △중국인 어부 신자 두 가족을 찾아서 그 집에 거주하게 할 것 △그들에게 어선 한 척을 살 돈을 줘서 그들이 조선 해안 근처에 고기를 잡으러 가게 할 것 △그들이 정해진 신호를 보면 조선인 신자 어부와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게 할 것을 지시 갈 수 있게 할 것이라는 앵베르 주교의 지시가 적혀 있었다.
페레올 신부는 22일간의 여행 끝에 9월 16일 봉천 곧 심양에 도착했다. 만주대목구 관할지임에도 불구하고 봉천 신자들은 페레올 신부를 극도로 냉대했다. 심지어 80~120㎞ 떨어진 외지에서 신자들이 몰려와 그를 몰아냈다. 아직도 북경교구를 관할하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의 영향력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페레올 신부는 하는 수 없이 봉천에서 400㎞ 떨어진 교우촌으로 몸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그곳이 바로 길림성 소팔가자(小八家子)이다. 학자들은 이때가 1840년 연말에서 1841년 연초 사이일 것으로 추정한다. 페레올 신부는 이곳 소팔가자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돼 마카오 극동대표부장 르그레즈와 신부가 1840년 3월과 8월에 쓴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페레올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저는 마카오를 떠나면서 아직 저의 행선지에 관해 분명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방금 르그레즈와 신부님이 제게 예전에 했던 약속에 따라서 저의 행선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저는 조선으로 갈 것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보자면 이는 정말 바람직한 소임지입니다.”(페레올 신부가 1841년 2월 12일 소팔가자에서 파리외방전교회 본부 지도 신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럼 페레올 신부는 언제 조선 선교사로 임명됐을까? 아마도 르그레즈와 신부는 1840년 3월 6일 페레올 신부가 마카오를 떠난 직후 얼마 안 돼 그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한다는 편지를 써서 서만자로 보냈을 것이다. 왜냐하면, 페레올 신부가 1840년 8월 1일 서만자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쓴 편지에 이미 자신이 조선대목구 소속 선교사인 것처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조선 입국을 위해 다방면으로 모색했으나 돌파구를 찾지 못한 페레올 신부는 소팔가자에서 2년 동안 옴짝달쌀 하지 못했다. 고착 상태에 빠져있던 그는 1842년 10월 조선 입국의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최양업과 김대건, 그리고 조선 선교사로 동갑내기인 메스트르 신부가 1842년 10월 요동반도 태장하에 도착한 것이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