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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의 기업] (24) 이명수 아벨 (주)키다리식품 대표

참 빛 사랑 2017. 1. 5. 12:09

어려운 이웃 위한 ‘키다리기업’을 꿈꾼다




▲ 키다리식품은 바른 먹을거리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도 앞장서고 있다. 사진은 키다리식품이 운영하고 있는 천안~논산 고속도로의 정안휴게소 전경.




정직과 성실은 기본이었다. 여기에 창의와 끈기가 더해졌다. 인고의 세월을 그렇게 거쳤다. 이제 돌아보니 모든 게 그분의 은총이었다. 키다리식품 이명수(아벨, 64) 대표가 살아온 삶이다.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지만 중학교 3학년 때 집안에 악재가 겹치면서 모든 게 바뀌었다. 그림에 대한 감각과 안목이 있어 미대 진학을 꿈꾸었던 소년은 고등학교 생활도 쉽지 않았다. 어렵사리 무선기술사 자격증을 따고 TV 고치는 기술을 배웠다. 흑백 TV가 동네 영화관 구실을 하던 1960년대 말이었다. 기술이 좋았는지 대전에서 서울로 스카우트돼 종로 세운상가에서 일했다.

수입은 많았지만 갓 20줄에 들어선 청년의 객지 생활이 순조로울 리 없었다. 삶이 엉망이었다. 결국 늑막염에 폐렴까지 겹쳐 1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대전으로 내려와 성모병원에 입원했다.

투병생활은 인생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었고 병실 벽에 걸린 십자고상은 자연스럽게 가톨릭에 관심을 갖게 해주었다. 퇴원하던 날 바로 대흥동성당에 가서 예비신자 교리를 신청했다. 이렇게 해서 1972년 12월 세례를 받았다. 세례명을 ‘아벨’로 정한 것은 아벨처럼 하느님께서 즐기시는 제물을 바치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다(창세 4,4).



주일학교 교리교사로 활동

다짐처럼 그는 레지오 마리애에 가입해 활동하고 주일학교 교리교사로 봉사했다. 뒤늦게 대학에 들어가서는 대전 가톨릭대학생연합회 1기로 활동했다. 대흥동본당에서 주일학교 교리교사로 활동하던 아내(이경애, 사비나)를 만난 것도 이때였다.

대학에 다닐 때도 옷가지 등을 떼어 넘기는 일을 아르바이트 삼아 했던 이명수 대표는 결혼하면서 부부가 함께 베지밀, 우유, 쿨피스 등을 취급하는 유통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열심히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짜냈다. 그중 하나가 베지밀을 가정에 직접 배달하는 일이었다.

“야쿠르트 아줌마들이 가정에 배달하기 전인 1980년대 초반에 이미 저희는 전국 최초로 베지밀을 각 가정에 전달하는 배급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에는 다방에서나 맛볼 수 있었던 쿨피스도 마찬가지고요.”

유통 대리점을 통해 잘 나가던 이 대표 부부는 그러나 보증을 잘못 서는 등 뜻밖의 상황이 발생하면서 하루아침에 빚더미에 올라앉고 말았다. 1986년 12월이었다. 월세방을 얻어 살면서 하루하루 벌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처지가 됐다.

찹쌀떡, 도넛, 과자 등을 떼어 동네 가게 납품하는 일로 다시 시작했다. 이 대표 부부는 납품하는 빵과 과자의 위생 관리를 철저히 했다. 제품뿐 아니라 제품 포장이나 용기에도 각별히 신경을 썼다. 가게에 들어온 손님들의 눈길이 자연히 그리로 향하게 되니 매출도 올랐다. 이 대표는 영역을 확대해 대전 천안 지역 고속도로 휴게소에도 납품을 시작했다. 그러다가 ‘털보네식품’과 인연을 맺었다.

“털보네우동은 당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밖에 먹을 수가 없었어요. 판로가 없었던 거지요. 그래서 직접 우동을 팔기로 했습니다. 장사가 되면서 체인점도 하나 냈습니다. 하지만 우동만으로는 손님을 끌 수가 없어서 다른 음식도 개발했는데 그 하나가 돌솥 비빔밥이었어요. 전국 최초였지요. ”

털보네우동은 대전 충청 지역에 100개의 체인점을 둘 정도로 급속히 성장했다. 하지만 이 대표는 1991년 초 체인점을 정리하고 털보네식품과 결별했다.

“체인점이 잘 되면서 왜 내게는 체인점을 열어 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며 멱살을 잡는 이들도 있었어요. 또 간혹 실패하는 체인점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가슴이 아팠지요. 둘 다 겪고 싶지 않더군요.”

국내의 한 대기업 식당에 털보네우동을 납품했는데, 직원들이 퉁퉁 불은 우동을 기피하는 바람에 실패한 것도 정리하기로 작정한 한 원인이었다. 1년 정도 재충전을 한 후 1992년 3월 (주)키다리식품을 설립, 독자적인 면 개발에 나섰다. 키다리 우동, 키다리 컵 국수 등을 개발해 고속도로 휴게소와 철도역점 등에 납품하고, 1997년에는 외식 사업에 진출하면서 본격적인 성장 궤도에 올랐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천안~논산고속도로의 정안(상·하)휴게소/주유소의 운영권을 획득하고, 컵국수 ‘우스면’을 출시하는 등 사업을 더욱 확장했다. 2006년에는 우스면을 미국에 수출하는 성과를 올렸다. 면 개발에 대한 이 대표의 열정은 계속 이어졌고 이는 15년 걸려 마침내 지난해 컵국수 ‘세이면’의 탄생으로 절정을 이뤘다. 가늘고(細), 이롭다(利)는 뜻의 세이면은 물을 넣은 후 저어서 바로 들기만 하면 된다.

현재 키다리식품은 현재 주력 제품을 생산하는 면 공장과 함께 고속도로 3곳에 주유소와 휴게소를 운영하면서 직원 500명을 둔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해 나가고 있다. 특히 바른 먹을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정안휴게소에서는 항생제를 전혀 쓰지 않은 국산 콩나물, 국산 콩으로 만든 두부, 국산 참깨로 만든 참기름만을 사용한다.

“정말 10년 동안은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잔 적이 없었고, 18년 이상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습니다. 신앙생활이라곤 겨우 주일만 지켰고, 한동안은 냉담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돌이켜보니 모든 것이 은총이라는 말이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이 대표는 2007년 본당(대전 탄방동본당) 사목회 부회장을 시작으로 사목회장을 거쳐 2014년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 당시에는 교구 평협회장으로 봉사했다. 교회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공로로 지난해 그레고리오 기사 훈장을 받았다.



‘모두를 위한 경제’에 눈 떠

정직과 성실을 신조로 누구보다도 투명하게 기업을 운영해 왔다고 자부해 온 이 대표 부부는 그러나 최근 포콜라레의 ‘모두를 위한 경제’(Economy of Communion) 강의를 듣고 생각이 달라졌다.

“저희는 직원들에게 월급과 수당만 주면 되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하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그게 전부가 아님을 깨달은 거죠. 부족한 것이 뭔지 알았으니 채워 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동화 속 키다리 아저씨처럼 어려운 이들을 돕고자 ‘키다리식품’이라고 회사 이름을 지었다는 이명수 대표. “행복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며, 함께 행복해야 한다는 새로운 깨달음을 주신 은총에 감사드린다”는 이 대표는 키가 180cm다. 키다리 아저씨 그대로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