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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의 기업] (25) 이정태 타대오 하이림전자 대표

참 빛 사랑 2017. 1. 6. 16:32

모퉁이의 머릿돌은 아니지만 ‘종지’ 역할 할 수 있어 감사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시편 118,22). 한때 뭔지 모르고 바쳤던 시편 기도. 세월이 흘러 되새겨볼수록 나를 위한 말씀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감사할 따름이다. 하이림전자 이정태(타대오, 66) 대표의 삶과 신앙이다.



구교우 집안인 이 대표는 경북 문경시 마성 출신이다. 2남 1녀의 막내인 그는 초등학교 1학년 때 아버지를, 5학년 때는 어머니를 여의었다. 고아가 된 세 남매는 큰아버지 집에서 살았다. 초등학교를 마치고는 서울의 소신학교(성신중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어른들 권유에 의한 것이었지만,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오는 집안의 깊은 신앙의 분위기, 가까운 친인척 가운데 사제 수도 성소의 길을 걷는 이들이 있었던 것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새벽 5시 30분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기도와 묵상, 미사로 시작하는 일과. 꽉 짜인 신학교 생활은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막 사춘기에 접어든 소년이 자칫하면 빠져들 수 있는 일탈의 위험을 막아 주는 든든한 보호처가 됐다. 게다가 소년의 순수한 신심을 키워 주는 데도 한몫 거들었다.



맹목적이지만 소박한 신심

“중학교 때였는데, 매괴성월(묵주 기도 성월)을 맞아 날마다 묵주 기도 5단(한 꿰미)씩을 늘려서 바쳐 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첫날 5단, 둘째 날 10단, 셋째 날 15단…이런 식으로 말이지요. 나중에는 쉬는 시간에는 물론 잠자는 시간마저 줄이면서 바쳐야 했지요. 20여 일 동안 계속하다가 결국은 다 바치지 못하고 잠이 드는 바람에 중단하고 말았습니다. 마지막에는 아마 하루에 130단을 바쳤을 겁니다. 맹목적이었지만 가식 없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신심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969년 대구대교구에서 안동교구가 분리, 신설되면서 이 대표는 1970년 대건신학대학(현 광주가톨릭대학교)에 진학했다. 신심 깊고 순박한 시골 소신학생의 모습은 대학에서도 여전했다. ‘집 짓는 이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말씀처럼,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살아온 자신도 하느님께서 뭔가 쓰실 일이 있으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했다. 미8군에 카투사로 배속돼 통역관으로 근무했다. 영어를 웬만큼 할 줄 알았던 덕분이었다. 카투사 생활은 온실 속에서 자란 청년에게는 새로운 세상이었다. 세상은 넓었고 자신은 우물 안 개구리였다. 성소의 갈등이 시작됐다. 복학해서 4학년을 마쳤으나 사제의 길은 아무래도 자신의 길이 아닌 것 같았고, 결국 길을 바꿨다.

“사회는 팔을 벌리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나를 붙잡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대건신학대학 졸업장은 쓸모가 없었습니다. 정말 아무것도 없었지요. 조그만 회사에 들어가 변전실 옆에서 합판을 침대 삼아 자취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거친 세파를 헤쳐나가고자 두 가지를 결심했다. ‘주어진 것에 최선을 다하자’와 ‘수입의 절반을 저축하자’였다. 수입이 적으면 적은 대로 절반을 저축하고 남은 돈으로 한 달을 지냈다. 때로는 라면 1박스로 한 달을 견디기도 했다. 사회생활에 필요한 다른 밑천도 있어야 했다. 죽자사자 공부해 1년여 만에 열관리기사 1급 자격증도 땄다.

사회에 적응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평생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온 신학교 생활 10년이 사회생활에 무익한 것만은 아니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맑고 겸손한 영혼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신선함을 주었다. 그 덕에 조금 큰 회사로 옮길 수 있었고, 무역업을 하는 회사에 발탁돼 영업과장을 지내기도 했다. 마침내 1989년 전화기 벨을 비롯해 각종 버저(buzzer)를 만드는 동보전자를 설립했다.

“그만둔 회사의 사장님이 회사를 차리라고 적지 않은 도움을 주셨습니다. 그때 저도 감사하는 삶, 나누는 삶을 살도록 노력하겠다고 거듭 다짐했지요.”

하지만 제조업 분야는 사실상 문외한이어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다. 10년쯤 지나면서 이 대표는 회사를 접어야 할지 심각하게 갈등했다. 그런데 정직과 성실이 또 밑천이 됐다. 거래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의 도움으로 통신기기와 전자통신 부품을 제조하는 (주)태일 테크노를 설립했다. 1998년이었다.

‘주어진 여건에서 최선을 다한다’는 좌우명에 따라 노력하면서 회사도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2006~2007년 금융 위기가 몰아치면서 회사도 비상 체제에 돌입했다. 위기 극복을 위해 이 대표가 취한 것은 두 가지. 소사장제 도입과 신소재 개발이었다.

“부장들에게 맡은 분야에 전권을 주고 책임지고 운영해 나가도록 하면서 소사장제를 도입했습니다. 이와 함께 장기적으로는 제조업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보고 신소재 사업으로 방향을 전환하기 시작했지요.”

이런 방식으로 어려움을 극복한 이 대표는 2010년 사명을 (주)하이림전자로 변경하면서 주 사업 품목을 스마트폰용 접착, 충격 방지, 열 분산 등을 목적으로 하는 테이프, 폼, 동박 등으로 옮겨갔다. 한때 중국에도 생산 공장을 두었으나 제조 부분은 차츰 손을 떼면서 지금은 신소재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돌이켜보면 그냥 모든 게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술도 없고 실력도 없어, 경쟁 사회에서 늘 밀릴 수밖에 없는데 많은 분의 도움으로 이렇게까지 살고 있으니까요.”



교리교사·사목회장 등으로 봉사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특히 회사를 처음 설립했을 때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있는 이 대표는 여건이 되는 한 나눔을 실천하면서 도움에 보답하는 삶을 살고 있다. 서울 둔촌동본당 본당 사목회 부회장 때 6개월 동안 주일 예비신자 교리반을 맡아 예비 신자들과 함께한 것을 무엇보다 소중하고 값진 ‘은총의 시기’로 여기고 있는 그는 지난해부터 사목회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집 짓는 사람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시편 말씀을 좌우명처럼 새기고 살아왔지만, 저는 모퉁이의 머릿돌이 아닙니다. 작은 ‘종지’에 불과합니다. 종지로라도 쓰일 수 있어서 감사할 따름이지요.”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