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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사람들

특별기고 - (6) 성전 건립 유감(有感)

참 빛 사랑 2024. 10. 25. 14:46
 

-뚝심과 효심으로 이룬 성전-

 

<강론>

2001-2005년, 25년 전 대전 변두리 성당(진잠)에서도 성전건립 기금 마련을 위해 홍삼 엑기스를 만들어 판매했었다. 불쌍하게 보여야 물품을 많이 사주다 보니... 못할 짓이지만 딱하게 보이려고 과장도 해봤다. 하지만 나는 어려운 형편에 관한 얘기를 슬프게 하기보다는 재미있게 표현하려고 나름 애를 많이 썼다. 어떤 신부는 기타를 치며 노래를 한다거나 엎어져 절을 하거나 울어 재낀다거나 별짓을 다한다는데,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하겠다.

 
  유구 특산품인 인견 이불과 반바지(파자마)를 팔 때에도 “저의 남다른 눈썰미와 동물 같은 감각으로 지금껏 대한민국에서 생산된 그 어떤 인견 이불보다 가성비가 뛰어난 이불을 만들어 왔습니다. 지금까지 이런 이불은 없었습니다 ~”또는 인견의 시원함을 강조하려다보니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 ‘시몬스’ 달라붙지 않는 쾌적함~” 등등 나도 생각지 못한 단어들이 막 튀어나왔다. 나름 언어 감각이 있다고 생각한다. 미사가 끝나면 재빨리 나와 성당 현관 문 앞에 서서 나오는 교우들에게 인사했다. “감사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신부가 교우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강복(복을 내려주는 것, 빌어주는 일)이라 여겨 일일이 다 할 수는 없고 신립하는 교우들에게, 또 이불을 구입하시는 신자들 중 원하는 분들에게 안수와 강복을 드렸다.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어떤 분은 강복 받기 위해서 굳이 “신립’도 ‘구입’도 한 분들이 있었다. 본인이 스스로 고백했다. 지금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는 이불에도 축복을 해주기도 했다.
 

가장 정성을 들인 부분이 강론인데, 말주변이 없는 나로서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것이 아니었다. 불쌍 모드로만 하기도 민망하고, 그래서 어려운 처지를 유머러스하고 재치있게 표현하고, 가능한 있는 그대로 사실을 진솔하게 표현하려 애썼다. 나름대로 순간적으로 애드리브와 기지가 튀어 나왔다. 너무 본당의 어려운 실정만 얘기하는 것은 못할 일이고 해당 성당 교우들이 주일 미사에 참례하여 ‘죽는~’소리만 듣는 것은 안 될 일이다 싶어 그날 복음을 중심으로 간단한 강론도 덧붙였다. 시간이 길지 않을까~ 또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하며 몇 번을 다시 보고 뜯어고치고~ 그래도 도움이 된 것은 목소리였다. 좋은 목소리를 주신 부모님께 감사한다. ‘성우’ 아니냐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남저음 목청이 한 몫 단단히 했다. 토요일 특전부터 주일 저녁 미사(끝미사)까지 같은 내용을 또 하고 또 하고 계속 반복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지만, 참석자들이 다 다르니 괜찮고, 횟수가 거듭될수록 거의 외우다시피 해서 좋은 점도 있었다. 한 주간 동안 복잡다단한 세상사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미사에 참례한 신자들에게 주님의 말씀만큼 큰 위로와 힘이 되는 게 또 있겠는가 싶어 한 본당을 다녀오면, 내려오는 순간부터 또 강론 걱정이었다. 본당마다 교세가 다르고, 분위기가 다르고 주보 성인이 또 다르고... 역사가 다르고, 그런 것까지 참고했다.

 

우리 판매조는 해당 성당에 도착하면, 나의 코치에 따라 이불 가판매를 세팅하고, 현수막을 설치하고 본당 주보를 달라 해서 신립서, 이불신청서, 팜플릿을 간지로 끼워서 정돈해놓고, 신자들이 신립서를 작성할 수 있도록 2~3명에 1자루씩 볼펜을 쫙 깔아 놓는다.

  신립이 많이 되고, 이불도 많이 팔리면 기분이 좋아 든든한 식사를 하고, 결과가 신통치 않으면, 실의에 빠지지 말라고 또 그런대로 괜찮은 식사를 하기도 했다. 어떤 때는 식사할 시간을 놓쳐서 내려오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인스턴트 식품으로 때우기도 하고, 더 늦을 때는 성당에 와서 주방에서 솥단지에 라면을 잔뜩 끓여서 퍼먹었다. 역시 최고의 맛이었다.
 

초반에는 서로 가려고 해서 사람을 골라야 할 정도였는데, 여러 번 가다 보니 지치기도 하고 농번기나 바쁜 때가 되면 못 가는 경우가 자주 있어, 이 사람 저 사람 전화를 걸어 달래도 보고 꼬셔보기도 하고... 참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다 보니 점차 말뚝 봉사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심신이 피곤하고 지치지만... 우리 성당 신자들만큼 그렇게 큰 여러 성당에 가서 미사를 참례해 본 사람도 드물 것이다.

 

다녀오면 신립금액, 이불판매액을 정산하고 명단을 작성해서 본당 컴퓨터에 저장하고, 공문을 통해 해당 본당 신부님께 보내드린다. 만원부터 십만 원, 이십만 원, 삼십만 원 선이 대부분이고,,, 100만 원 이상이 몇십 명 되고, 가끔씩 500만 원 이상,,, 매우 드물게 천만 원 봉헌하는 분도 있다. 어떤 경우는 3천만 원,,, 5천만 원, 1억도 봉헌하는 분이 있다... 눈물 나도록 고맙기도 하면서, 나라면 저렇게 봉헌할 수 있을까... 자문해보다... 결코 못할 것 같다는 확신 아닌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30만 원 이상 신립한 교우들에게는 감사 문자을 보내드렸다. 후원해주신 분들에게 모두 보내고 싶었지만. 그러다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사무실에서도 그 일을 하느라 다른 일 하기가 어려웠다...

 
  되돌아보면 7~8년간 기금 마련하는 동안 사고 한 번 없었다. 참으로 기묘하고 감사한 일이다. 초창기에 길을 잘못 들어 조금 늦게 도착하는 일은 있었어도, 단 한 번도 사고 없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던 것은 분명 하느님과 천사들의 도우심이 아닐 수 없었다. 성전을 짓는 일은 참으로 한 본당의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본당 공동체의 모든 역량의 결과물인 것이다. 새삼 후원자들과 은인들의 고마움과 더불어 모든 믿는 이들의 통공을 실감한다.
 

대전교구 정필국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