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에 완벽한 제약이 생기니 외출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내 몸보다 거대한 휠체어를 끌고 나가야 하기에 혼자 힘으로는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질 않는다. 하루, 이틀⋯. 창밖만 바라보다가 큰맘 먹고 외출 준비를 한다.
애써 나간다고 한들 나를 운전할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니다. 전동 휠체어가 아니다 보니 누군가가 나의 휠체어를 밀어주어야 하는데, 타인의 손에 나를 완전히 맡긴다는 것은 굉장히 두려운 일이었다. 낮은 턱과 충돌해도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 충격은 생각보다 크며, 운전자가 장애물을 넘겠다고 나와의 소통 없이 휠체어를 갑자기 뒤로 젖혔을 때 순간적으로 드는 그 공포감은 또 얼마나 큰지 모른다.
두 다리로 당연하게 걸어다닐 땐 전혀 불편을 느끼지 못했던 보도블록도 휠체어를 타고 보니 깨지고 빠진 블록이 얼마나 많은지. 이맘 때만 되면 여기저기 놓여있는 ‘도로 공사중’이라는 팻말을 보며 멀쩡한 도로를 뒤집어 쓸데없이 세금 낭비를 하는 게 아니냐며 욕하던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누군가에게는 진짜 필요한 공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이보다 더 힘든 건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외로움이다. 사람들과 눈높이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한 답답함뿐만 아니라 왠지 모를 위축감까지 들게 했다. 휠체어에 앉으면 사람들의 가슴 끝, 명치 정도의 위치에 나의 시선이 닿게 되는데, 그 느낌은 아주 견고한 벽과 내가 지속적으로 부딪히는 기분이었다.
또 나는 최선을 다해 나의 휠체어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쓰며 가고 있는데도 내 입에서는 연신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내뱉어졌다. 나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대방의 불찰로 생긴 접촉에도, 휠체어를 탔다는 이유로 매번 내가 먼저 눈치가 보였고 죄송했다. 눈높이가 다르니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는 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그 시선은 또 얼마나 차갑게 느껴지는지.
휠체어를 탄다는 것은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길 위를 매 순간 긴장하며 헤쳐나가야 하는, 원치 않는 모험에 끝없이 참여하는 일이었다. 장애를 가지신 분들이 세상 밖으로 나와 생활하기 위해 얼마나 큰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하는지, 그분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이 들었다.
어디선가 우연히 읽었던 ‘인디언 지혜’의 글귀가 떠오른다. “남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면 그 사람의 신발을 신고 일주일은 걸어봐야 한다.”
타인의 신발을 신고 일주일만 살아보면 그 사람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글이다. 나는 요즘 정말 다양한 타인의 신발을 신어보고 있는 것 같다. 덕분에 아픔을 이해하는 폭이 깊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특별한 은총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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