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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한국 교회 향기 스며든 미국 뉴튼수도원

참 빛 사랑 2024. 10. 23. 20:34
 
 
올해 설립 100주년을 맞은 미국 성 베네딕도회 뉴튼 성 바오로수도원. 2002년부터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분원이 된 뉴튼수도원은 ‘기도하고 일하라’는 수도회 영성을 바탕으로 타국에서 한국 수도원의 향기를 전하며 한인 신자와 이민자의 영적 보금자리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과 미국, 한국으로 이어진 100년간의 특별한 인연을 간직한 뉴튼수도원을 찾았다.

박민규 기자 mk@cpbc.co.kr
 
뉴튼수도원 초입에 베네딕도회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뉴튼수도원 성당 입구.
 
뉴튼수도원 수사들이 미사 후 묘지로 이어지는 기도길을 바라보고 있다.



기도하고 일하라

비행기로 15시간에 뉴욕 존에프케네디 공항에서도 150㎞ 떨어진 뉴튼수도원. 지구 반대편 미국 뉴저지 뉴튼에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분원이 자리하고 있다.

수도원의 반 이상이 숲으로 이뤄졌지만, 52만 평(430 에이커)이 넘는 부지는 실감하기 힘들 정도로 큰 규모다. 이곳을 9명의 수도자가 모두 관리하고 있다.

여느때처럼 농장일을 하던 원장 김동권 신부를 비롯한 수사들은 형제의 이름으로 한국에서 방문한 왜관수도원장 박현동 아빠스와 수사들을 뜨겁게 환대했다.

“지난밤 곰 때문에 농장 문짝이 또 휘어졌네요.” 수사들은 곰을 마치 사나운 길고양이가 왔다 간 정도로 얘기했다. 반딧불과 은하수도 보이는 청정 지역 속에 자리한 수도원. 하지만 압도하는 자연의 신비만큼이나 할 일도 많다.

뉴튼수도원은 크리스마스 트리 농장을 조성해 추수감사절 다음날부터 주님 성탄 대축일 직전 주일까지 트리를 판매하고 있다. 끝없이 자라나는 풀을 베고 가지마다 방충제 뿌리는 일을 담당하는 이수용 수사는 “수도생활의 한 부분”이라며 덤덤하게 말했다.

뉴튼수도원에 파견된 1기 구성원인 부원장 유광재 수사는 “처음 왔을 때 연로한 신부들만 있어 수도원 건물과 주변 상황이 정말 심각했다”며 “비가 새는 지붕을 수리하고 보도블록을 설치하는 등 복구에 온 힘을 쏟았다”고 전했다. 이를 지켜보던 미국 신자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일하는 수사들은 처음 봤다며 놀랄 정도였단다. 그렇게 땅 위에 흘린 수도자들의 구슬땀과 매일 쌓인 기도 안에서 뉴튼수도원은 100주년을 맞았다.

 
뉴튼수도원 설립 당시 건물.
 
뉴튼수도원 설립 초기 수사들.


100년의 인연

뉴튼수도원은 독일인이 설립하고, 미국인이 운영하다 한국 수도원 소속으로 이어지게 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독일 상트 오틸리엔 연합회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선교지에 경제적 지원을 위해 미카엘 하인라인 신부를 미국에 파견, 1924년 데레사 성녀를 주보로 ‘작은 꽃’ 뉴튼수도원을 설립했다. 설립 후 수많은 청년이 수도원을 찾았고, 1947년 아빠스좌 수도원으로 승격하면서 현재의 성 바오로수도원으로 변경했다. 한때 70명 가까운 수도자들이 생활할 만큼 활기를 띠었다. 1962년에는 새 건물을 지어 확장 이전까지 했지만, 성소자 수가 급감하면서 여러 사업을 축소했다. 1990년대 중반까지 버텨왔지만, 10명의 노(老) 수도자들이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연합회에 수도원 폐쇄 신청을 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하느님의 섭리는 지구 반대편 한국에서 이어졌다.

연합회는 왜관수도원에 손을 내밀었고, 이를 받아들여 2002년 1월 25일 뉴튼수도원은 왜관수도원 분원으로 공식 선포됐다. 그러나 이미 두 수도원의 인연은 100년 전부터 이어지고 있었다. 덕원수도원 시절 하느님의 종 신상원 보니파시오 주교 아빠스는 설립 초기 뉴튼수도원을 정기 방문하며 경제적 지원을 이끌었고, 왜관수도원 초대 원장 디모테오 비테를리 신부는 뉴튼수도원에 머무르며 설립을 준비했다.

 
마리너스 수사 .


특히 6·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2월 한국인 1만 4000명을 흥남에서 거제도까지 피신시킨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레너드 라루 선장 이야기는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 불리며 교회를 넘어 한국과 미국 사회에 큰 감동을 주고 있다. 그는 이후 1954년 뉴튼수도원에 입회해 ‘마리너스’라는 수도명으로 47년간 수도생활을 이어갔다.

마리너스 수사는 수도원 성물방 소임을 하며 누구에게도 자신의 행적을 이야기하지 않아 아빠스조차 몰랐을 만큼 겸손했다고 한다. 현재 미국 주교회의의 전폭적 지지를 얻고 시복시성을 추진 중이다.

 
뉴튼수도원 원장 김동권 신부 주례로 미사가 봉헌되고 있다.
 
뉴튼수도원 수도자들과 100주년 축하차 방문한 박현동 아빠스를 비롯한 왜관수도원·요셉수도원 수사들이 식사 전 기도를 하고 있다.




새로운 100년을 향해

현재 수도원에는 6명의 한국 수도자들과 미국 출신 제3대 수도원장 저스틴 지코비츠 아빠스·제4대 수도원장 죠엘 마쿨 아빠스, 그리고 탄자니아 출신 버나딘 수사까지 9명이 수도생활을 하고 있다. 언어는 물론 음식과 여러 문화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아직도 매운 한국 음식이 나왔을 때 입에 넣자마자 연신 부채질을 하는 죠엘 아빠스와 버나딘 수사. 하지만 일상의 다름이 수도자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데 전혀 걸림돌이 되진 않는다. 반복되는 전례와 노동 안에서 하나가 된다. 그렇게 기도와 노동으로 일상을 채우며 새로운 100년을 만들어가고 있다.



 
원장 김동권 신부.

뉴튼수도원 원장 김동권 신부 인터뷰



미국 펜실베이니아에서 유학 중 뉴튼수도원으로 소임을 받은 김동권 신부는 공부를 끝내고 2003년 합류했다. “순명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공부 중에도 바로 간다고 할 정도였죠.”

처음에는 미국 수도자들이 운영하는 수도원을 물려받았으니 현지 분위기를 이어갈 계획이었다. 하지만 이후 한국 수도원이 있다는 말에 시카고에서 2시간 넘게 비행기를 타고 오는 신자가 생겨날 정도로 한인 신자들에게 영적 안식처가 돼갔다. 2007년 원장직을 맡게 된 김 신부는 한인 신자와 이민자에게 큰 위로의 공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들을 배려하는 데 더 많은 정성을 쏟았다.

한인들을 위해 피정 집을 개조했고, 밭에 꽃배와 꽃사과·토마토·고추·비트·더덕·상추 등 무공해 채소와 과일나무를 심어 방문하는 신자들에게 나눠주고 있다. 수도원을 가득 메운 식수에는 신자들의 이름을 달아주기도 했다. 또 영어로만 하던 전례를 한국 신자와 수도자를 위해 아침·저녁기도를 한국어로 하고 주일 미사와 2번의 평일 미사도 한국어로 봉헌하게 됐다. “이국땅에서 고생하다 수도원에 오면 고향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그때 참 보람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추세인 성소자 감소 문제는 이곳도 예외가 아니다. 수도자들뿐 아니라 방문하는 신자들도 성소자가 많이 배출돼 영적 보금자리 역할을 이어가길 바라고 있다.

“뉴튼수도원의 100년은 하느님 섭리 가운데 함께 이룬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우리의 100년을 준비하고자 합니다. 오래된 성전을 소박하고 아름답게 보수할 생각입니다. 하느님 뜻에 맡기고 있지만, 성소자 발굴에 우선적인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주 예수 그리스도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마라’는 베네딕도 성인의 말씀에 따라, 이곳을 찾는 모든 이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계획입니다. 기도하고 일하는 단순한 삶 안에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