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3월 10일 교황령 「복음의 비옥한 씨」를 반포한 성 요한 23세 교황.
성 요한 23세 교황, 교계제도 설정 교황령 반포
해방과 전쟁·휴전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의 재건 노력은 계속 어려움을 겪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의 교회 탄압은 야당 견제와 관련이 있었다. 야당 지도자였던 장면(張勉, 요한, 1899~1966)과 가톨릭교회를 하나로 생각한 것. 이승만 정권은 1959년 서울대목구에서 간행했던 ‘경향신문’을 폐간시켰으나 국내외의 반대 여론에 부딪히자 폐간을 철회하고 무기정간 처분을 내렸다.
이승만 정권이 1960년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이듬해 5·16 군사쿠데타(정변)로 군사정부가 들어섰다. 군사정부는 자신들의 정권을 국제적으로 승인받기 위해 가톨릭교회의 협조를 얻고자 했다. 당시 주한 교황사절 하비에르 주피 대주교는 쿠데타 세력이 반공체제를 강화한다는 데 특별한 호감을 가지고, 미국에 앞서 박정희 정권을 인정했다.
이러한 변화와 혼란 속에서 성 요한 23세 교황은 1962년 한국 가톨릭교회의 교계제도를 설정했다. 요한 23세 교황은 한국 교회가 충분히 성장하고 성숙한 것으로 판단하여 3월 10일 「복음의 비옥한 씨(Fertile Evangelii)」라는 교황령을 반포했다. 교계제도를 설정한다는 것은 그 지역에 독립적으로 성사를 수행할 수 있도록 신품권(神品權)을 부여하고, 교회의 행정을 자치적으로 행할 수 있는 재치권(裁治權)을 인정하는 것이다.
「복음의 비옥한 씨」
천주의 종들의 종, 주교 요한은 영원한 기념을 위하여 이 교서를 반포하노라.
천주의 진리를 전하는 거룩한 전령사들이, 그리스도의 명을 받들어 세상 극변까지 전달하기로 위탁받은 ‘복음의 비옥한 씨’는, 성령의 은혜와 사도들의 공으로, 만백성과 민족과 나라에 전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에서는 그 뿌리를 깊이 박고,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열매가 풍성한 큰 나무로 자랐도다. 그중에는 과연 언제나 진리를 신속히 받아들이는 고귀한 민족인 ‘한국’이 있었도다. 그러므로 포교성성에서는 한국에 ‘가톨릭 교계제도’를 설정함이 좋을 것으로 보았고⋯ 이제 그들을 ‘정주(定住, Residentia) 주교’로 올리고자 하노니⋯. (「경향잡지」 제54권 제8호(1133호, 1962년 8월), 4~6쪽)
1962년 한국 교회 교계 설정으로 팔리움을 받는 세 대주교. 왼쪽부터 광주대교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 서울대교구장 노기남 대주교, 대구대교구장 서정길 대주교. 출처=「노기남」(한국교회사연구소 펴냄)
1963년 대한민국 정부와 교황청 공식 수교
이러한 교령으로 한국 교회는 △서울(평양·함흥·춘천·인천·대전 관할) △대구(청주·부산 관할) △광주(전주 관할) 세 개의 대주교 관구 아래 11개 교구를 편제하게 되었다. 앞서 대목구(代牧區) 시절에는 명의 주교(titular bishop)를 썼으나, 이제 비로소 본 교구의 교구장 이름을 쓰면서 자치 교구로 성장한 것이다.
1962년 교계제도의 설정으로 한국 교회는 당당한 보편 교회의 일원으로 발전했다. 그해 서울대교구 신자들만 12만 8545명으로 집계되었다. 서울이 점차 확장되면서 1963년 서울시와 인천교구 관할 지역을 제외한 경기 전 지역을 수원교구로 분리해 독립시켰다. 초대 수원교구장에는 당시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총무였던 윤공희 신부를 임명하였다. 또 1963년에는 한국 정부와 교황청이 외교 사절단을 교환하기로 하면서 주한 교황사절 델 주디체 대주교를 교황공사(公使, Internuntius)로 승격시켰다. 이로써 한국과 교황청 간의 정식 외교관계가 성립됐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석한 한국 주교단이 1962년 11월 9일 성 요한 23세 교황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교계제도가 수립된 그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여러 명의 주교와 사제가 참여하도록 했다.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이 보편 공의회에서 전례의 모국어 사용을 승인하게 되었고, 한국 교회도 이에 맞춰 전례에 쓰이는 경문을 한국어로 번역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에 따라 이를 실천하기 위해 주교회의 산하에서 ‘전국 전례위원회’ ‘교리 교수와 공식 기도서에 관한 전국위원회’ 등이 생겨났다. 아울러 교회 용어 통일을 위해 ‘가톨릭 용어 사전 편찬위원회’ 등의 조직도 만들어졌다.
1962년 한국 교회 교계 설정을 경축하는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1965년부터 모국어 사용 등 전례 개혁
1965년부터 미사에 한국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미사 중 한국어 사용 부분은 다음과 같다. 기리에(Kyrie, 자비송)·글로리아(Gloria, 대영광송)·독서·복음·크레도(Credo, 사도신경) ⋯창미사나 대미사에 있어서 영복경과 신경을, 한국어에 맞추어 성가가 작성될 때까지는 종전과 같이 라틴어로 창한다. ⋯교우에게 영성체시켜 줄 때 : 사제가 한국어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면 교우는 ‘아멘’이라고 대답한다.” 「미사에 한국어 사용과 통일된 천주 찬미경」(1965년 1월 1일부터 시행)
한국 주교회의는 미사에서 사용할 한국어 기도문을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발간한 한국어 「미사경본」의 것으로 채택했다. 또 미사 전례예식도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전례의 새로운 규정들은 「경향잡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는 새로 지은 성당에는 신자들을 향해서 제대를 설치한다.
서간경과 복음을 이후부터는 신자들을 향해서 읽는다.
마지막 복음과 미사 후 레오 교황 기도문을 없애고 마지막 복음 직전 강복으로써 미사가 끝난다. 현재 미사 중에 신자들이 소리 내지 않고 염하는 기도문 중 몇 가지는 큰소리로 또는 노래로 한다. 신자들이 사용할 미사 경본은 전국 주교회의에서 결정한다.” (「경향잡지」 제1160호, 1964년 11월)
1969년 한국인 첫 추기경으로 서임된 ‘하느님의 종’ 고 김수환 추기경. 가톨릭평화신문 DB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미사 전례이지만, 당시로선 모국어 사용과 제대의 변화 등 매우 큰 변화 속에서 전례 개혁이 이뤄진 것이다. 이러한 공의회 정신에 근거하여 교리학습을 위한 「가톨릭 교리서」가 1967년 간행되고, 100년 이상 사용하던 「천주성교공과」 기도서를 1972년에 「가톨릭 기도서」로 간행했다. 우리 교회는 다시 평신도의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평신도 사도직’이라는 공의회 정신을 더욱 실현하였고, 1968년 전국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가 결성되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또 공의회 정신에 따라 ‘교회일치운동’을 전개했다. 타 종교를 ‘열교(裂敎)’나 ‘이단(異端)’이라 부르지 않고 진리에 대해 대화하는 상대로 보기 시작했으며, 개신교와 함께 공동번역 성서를 간행하였다. 또한, 교회는 당시 열악한 노동환경, 농민들의 어려움을 동감하면서 ‘노동청년회’와 ‘가톨릭농민회’ 등을 결성해 교회의 사회 참여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복지에 중점을 뒀다. 이런 변화 속에서 1968년 김수환 주교가 제11대 서울교구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국인 첫 추기경으로 서임됐다.
<가톨릭평화신문-한국교회사연구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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