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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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현장 보고, 허련 선생 5대 작품 감상..보배섬 진도여행

참 빛 사랑 2016. 11. 10. 12:05


아픔의 땅 팽목항..계절은 열 번 바뀌었지만 "잊지 않을게" 약속

팽목항을 찾은 날, 마침 김광석과 관련한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었다. 깊고 서정적인 그의 노래가 세월호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위로가 됐으면 좋겠다. 진도=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많이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면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다크 투어리즘은 비극적 역사의 현장을 기억하고 되풀이하지 말자는 교훈을 얻는 여행이다. 진도와 팽목항도 그런 범주에 해당하는지, 여행지로 소개해도 괜찮을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2년 하고도 7개월이 다돼가지만 세월호의 비극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아직도 9명의 희생자가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한 상태이고, 선체는 수많은 의문부호를 품은 채 여전히 물밑에 가라앉아 있다.


“인양이 끝나면 미국의 그라운드제로처럼 모두가 찾는 곳, 기억하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 고 진윤희(사고 당시 단원고 2학년)양의 삼촌 김성훈씨는 개인적인 의견임을 전제로 조심스레 입을 뗐다. 사고현장이 코앞에 내려다보이는 동거차도에는 유가족들이 3개의 텐트를 치고 교대로 인양과정을 기록하며 지켜보고 있다. 이들에게 물품을 전달하기 위해 팽목항에 온 임영태씨도 세월호의 비극이 조금씩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며 “여행이든 관광이든 또 하나의 교육의 장이 되지 않겠냐”는 의견을 내놓았다. 임씨는 동거차도는 비극의 현장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아늑하고 포근할 뿐만 아니라, 전망까지 아름다워 현장에 오기전의 두려움마저 잊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인양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동거차도. ⓒ임영태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이 인양과정을 지켜보고 있는 동거차도. ⓒ임영태
유가족 임시 숙소에 마련된 분향소. 미수습 희생자 9명의 사진이 걸려있다.
유가족 임시 숙소에 마련된 분향소. 미수습 희생자 9명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림 4 추모의 글귀를 적은 조약돌
그림 4 추모의 글귀를 적은 조약돌

먼 길이다. 서울에서 400km가 넘는 거리, 쉬지 않고 달려도 5시간이 빠듯하다. 그날 아이들을 만나러 버스에 올라 진도로 향한 부모들에게는 50시간보다 길게 느껴졌으리라. 진도대교를 지나서도 팽목항까지는 35km, 진도읍내를 지나면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좁아져 한결 느려진다.

목적지 팽목항을 코앞에 두고 석성삼거리 왼편 자그마한 공원에 차를 멈췄다. 진도군에서 조성한 무궁화동산 바로 위에 ‘세월호 기억의 숲’이 따로 만들어졌다. 영화배우 오드리 헵번의 아들이자 ‘유니세프 오드리 헵번 협회’ 명예회장 션 헵번 페러의 제안으로 304명의 희생자를 기리는 300여 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었다. 사회적 기업 트리플래닛이 크라우드펀딩으로 기금을 조성하고 416가족협의회와 진도군, 전라남도가 힘을 보탰다.

“우리의 그 어떤 행동이나 그 어떤 말도 바다에 가족을 잃어야 했던 유가족 분들의 아픔과 비통함을 덜어드릴 수는 없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분들의 희생이 절대로 잊혀지지 않도록 하는 것입니다.” 안내문의 션 헵번 페러의 기념사는 오래된 과거처럼 담담하다. 그러나 노란 리본을 매단 은행나무로 눈길을 돌리면 억눌렀던 설움이 한꺼번에 터진다. “그립고 보고 싶은 내 아가”, “사랑하는 우리 막내 딸…많이 보고 싶다 똥강아지”, “미안하고 사랑한다. 엄마아빠의 하나 밖에 없는 귀한 공주” 나무마다 붙은, 먼 길 떠난 아이에게 보내는 어미와 아비의 편지는 차마 계속 읽어 내리기 힘들다.

300여 그루 은행나무로 조성한 ‘세월호 기억의 숲’
300여 그루 은행나무로 조성한 ‘세월호 기억의 숲’
몇몇 나무 앞에는 희생자 가족의 편지를 적은 팻말이 세워져 있다.
몇몇 나무 앞에는 희생자 가족의 편지를 적은 팻말이 세워져 있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팽목항에 닿았다. 방파제는 ‘기억의 벽’으로 장식됐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돈과 권력에 지배 받지 않는 민주 사회로 거듭나야 한다’는 전 국민의 다짐이 4,656장의 타일에 빼곡히 새겨져 있다. 초입의 ‘기다림의 의자’에서부터 끝자락 노란 리본이 장식된 빨간 등대까지 200m 방파제가 모자랄 정도다.

“10번째 계절엔 은화야, 엄마랑 만나자…꼭!”, “아들아 이제 그만 집에 가자”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이들의 사진과 이름이 내걸린 현수막이 다시 한번 가슴을 찢어 놓는다. 단원고 2명의 교사와 4명의 학생, 그리고 3명의 일반 승객의 시신은 여전히 세월호에 갇혀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임시 숙소에 설치된 희생자 추모 상징물 뒤로 ‘기억의 벽’으로 꾸민 방파제가 보인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임시 숙소에 설치된 희생자 추모 상징물 뒤로 ‘기억의 벽’으로 꾸민 방파제가 보인다.
팽목항 방파제에는 추모 글을 적은 타일을 붙여 ‘기억의 벽’으로 꾸몄다.
팽목항 방파제에는 추모 글을 적은 타일을 붙여 ‘기억의 벽’으로 꾸몄다.
방파제 끝 등대에 햇살이 비친다. 세월호의 진실도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났으면…
방파제 끝 등대에 햇살이 비친다. 세월호의 진실도 그렇게 선명하게 드러났으면…
사고 현장은 팽목항에서도 30km 떨어진 곳. 온전한 인양을 바라는 깃발이 바람에 닳아 헤졌다.
사고 현장은 팽목항에서도 30km 떨어진 곳. 온전한 인양을 바라는 깃발이 바람에 닳아헤졌다.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 미수습 희생자 가족의 현수막
얼마를 더 기다려야 할까? 미수습 희생자 가족의 현수막
현수막 뒤편이 희생자 유가족들의 임시 숙소다.
현수막 뒤편이 희생자 유가족들의 임시 숙소다.
임시 숙소 앞의 현수막에 또 가슴이 저리다.
임시 숙소 앞의 현수막에 또 가슴이 저리다.
진실이 인양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잊지 않은 것이다.
진실이 인양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은 잊지 않은 것이다.

사고 이후 10번째 계절이 지나고 11번째 계절로 접어들었다. 그 사이 온전한 인양을 바라는 깃발은 바람에 닳아 반쯤 헤지고, 일부 현수막은 글자를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빛이 바랬다. 그렇게 잊혀지는 걸까? 많이 늦게 왔다고, 그래서 더 미안하다고 한바탕 눈물을 쏟고 나면 기억하겠다는 약속과 잊지 않겠다는 다짐은 더욱 또렷해진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진도를 찾고 팽목항을 돌아보고, 진실이 인양될 때까지 꾸준히 물어야 한다. #그런데_세월호는? #그리고_7시간은?

▦명량해전 현장 보고 허련 선생 5대 작품 구경…보배섬 진도 한 바퀴

세월호를 빼고 진도를 말할 수 없게 됐지만, ‘보배섬’이라 자부할 만큼 진도는 곳곳에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진도 초입의 진도타워.
진도 초입의 진도타워.
진도타워의 충무공 동상.
진도타워의 충무공 동상.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진도타워에서 내려다 본 진도대교와 울돌목.

해남에서 진도대교를 건너면 왼편 산꼭대기에 진도타워가 상징처럼 솟아 있다. 정유재란 때 충무공 이순신이 13척의 배로 300여 척의 왜선을 물리친 명량해전의 격전지가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이다. 암초에 부딪힌 물살 소리가 바다의 울음 같다는 비유처럼 울돌목(명량해협)의 소용돌이 너머 해남으로 이어지는 다도해 풍경이 시원하다.

진도대교 동남쪽 직선으로 5km(찻길로는 13km) 떨어진 벽파진에는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가 세워져 있다. 명량해전의 승리를 기념하고 진도 출신 순절자를 기리기 위해 1956년 세운 비석이다. 비신의 높이는 3.8m에 불과하지만 박정택 진도문화해설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비석이라고 자랑한다. 이유는 바로 좌대에 있다. 거북 형상의 좌대는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이 아니라 현장의 바위를 깨고 쪼개 조각했다. 그 바위가 벽파진 아래 바다까지 연결되어 있으니 전체 높이는 11m가 넘는다는 설명이다.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충무공 벽파진 전첩비.
거북 좌대가 바다까지 이어진 바위와 한 몸이어서 ‘세계 최대 비석’이라고 자랑한다.
거북 좌대가 바다까지 이어진 바위와 한 몸이어서 ‘세계 최대 비석’이라고 자랑한다.
서예가 손재형이 쓴 비문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작품이다.
서예가 손재형이 쓴 비문은 한 글자 한 글자가 작품이다.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진도와 육지와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벽파진은 진도대교가 건설되기 전까지 진도와 육지와 연결하던 나루터였다.

비석에 새긴 글씨도 기념비를 한결 커 보이게 한다. 시인 이은상의 글을 서예의 대가 손재형이 썼는데, 888자 어느 하나 같은 것이 없다. 36번이나 쓴 ‘이’자도 모두 다르고, 간단한 열 십자(十)도 각기 다른 모양이다. 달월(月)과 날일(日)은 초기 상형문자를 보듯 그림에 가깝다. 한 글자 한 글자가 작품이면서도 조화가 흐트러지지 않아 ‘세계 최대 비석’의 명성에 걸맞다. 벽파진은 충무공이 명량해전 직전 16일간 머물렀던 곳이고, 1984년 진도대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진도 사람들이 육지를 왕래하던 나루터였다.

진도읍내에서 가까운 운림산방은 동양화의 대가 소치 허련(1808~1893) 선생이 말년에 여생을 보낸 화실이다. 진도에서 가장 높은 첨찰산(495m)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잡았다. 날씨가 습한 날이면 산중턱의 낮은 구름이 포근하게 감싸고, 맑은 날이라도 ‘구름 숲’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만큼 산세와 잘 어울리는 정원이자 자체로 한 폭의 동양화다.

150년 된 배롱나무가 심겨진 연못 뒤편 허련의 생가와 사당은 1982년 손자인 남농 허건이 복원했다. 회를 바르지 않고 흙 한 줌, 돌 하나 차례로 얹어 마감한 흙벽은 진도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랐다. 생가 동편 둥그렇게 패인 돌 항아리에 흐르는 우물은 소치가 일기장에서 ‘세수하고 양치했다’고 묘사한 그대로다.

첨찰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운림산방.
첨찰산 아래 아늑하게 자리잡은 운림산방.
흙과 돌로 마감한 소치 생가
흙과 돌로 마감한 소치 생가
일몰이 아름다운 세방낙조 전망대
일몰이 아름다운 세방낙조 전망대

생가 옆 소치기념관엔 5대에 걸쳐 동양화의 맥을 잇고 있는 이 집안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아들 허형, 손자 허림ㆍ허건, 증손 허문, 고손 허준ㆍ허재ㆍ허진ㆍ허청규까지 이어지는 화가 집안의 내력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그림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조선후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양화의 변화와 흐름도 읽을 수 있다.

진도여행 마무리 장소로는 벽파진의 정반대편인 세방낙조 전망대가 좋겠다. 해안도로 바로 옆이어서 접근성도 편리하다. 이곳 낙조가 이름난 것은 불과 몇 년 전, 점점이 흩어진 다도해로 떨어지는 일몰의 아름다움을 먼저 알아본 화가들이 찾아오면서부터다. 지금은 없어진 동백사의 전설에서 비롯된 손가락섬, 발가락섬, 불도, 가사도, 혈도 등 크고 작은 섬들 사이로 발갛게 떨어지는 석양이 한없이 평화롭다.


진도=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mailto:choissoo@hankook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