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사랑의 신앙" , " 믿음과 진리를 "추구하며!..

가볼곳?(국내)

이순신 vs. 조문국 왕, 다른 결과 낳은 '노적봉 전술'

참 빛 사랑 2016. 11. 29. 20:41



 목포 시내와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유달산의 이순신 장군 동상


[오마이뉴스정만진 기자] ⓒ 정만진


높이 530.2m인 경북 의성 금성산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死火山)이다. 185년, 신라와 조문국 사이의 치열한 전쟁이 이 산에서 벌어진다. 물론 신라는 뒷날 삼국을 통일하여 우리 국사에 큰 이름을 남긴 강국이고, 조문국은 지금 그 이름을 아는 국민이 별로 없을 만큼 당시에도 약국이었으므로, 전쟁은 신라의 승리로 끝난다.

그런데 크게 알려지지 않은 전쟁이지만 금성산 혈투에는 유명한 전설이 깃들어 있다. '노적봉 전설'이다. 노적봉 전설이라면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목포 유달산에 남긴 이야기 아닌가? 그렇다. 바로 그 노적봉 전설이 금성산에 화산 잿더미와 함께 묻혀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화산에 묻혀 있는 노적봉 전설

노적봉은 금성산 정상과 해발 670.5m의 비봉산 중간에 있는 봉우리이다. 조문국 왕은 이 봉우리를 짚으로 덮어 군량미가 충분한 것처럼 신라군을 속였다. 또, 흰 빛깔이 나는 흙을 계곡 물에 풀어 쌀뜨물처럼 보이도록 하는 방법도 썼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목포 노적봉에 적용했던 것과 대동소이한 속임수를 조문국 왕은 1400여 년 전에 사용했던 것이다.

 신라와 조문국 사이의 전쟁 때 노적봉 전술이 구사되었던 경북 의성 금성산
ⓒ 정만진
전쟁은 조문국 왕이 신라 벌휴왕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면서 시작되었다. 2천 명의 신라군이 조문국을 공격한다. 조문국왕은 금성산에 석성(石城)을 쌓고 저항하는데, 신라군은 숫자로 상대도 되지 않는 조문국 군대를 격파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쟁이 길어지면서 조문국 산성 안은 식량이 떨어져 간다. 그래서 노적봉을 만들어 신라군을 속였다. 신라군은 멈칫하였지만 물러가지는 않았다. 여기서 신라군이 물러났다면 조문국의 노적봉 설화는 후대에 더욱 빛이 났을 것이다. 싸움은 결국 조문국에 불리해졌고, 조문국 왕은 신라군의 대장과 결투를 하던 중 전사하고 만다.

안타깝지만, 실패로 끝난 조문국 왕의 노적봉 전술

안타깝지만, 조문국 왕의 노적봉 전술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조문국 왕이 생각해낸 노적봉 전술은 아주 멋진 계책이었지만, 처음부터 적국을 우습게 여긴 신라는 군량미가 산처럼 쌓인 노적봉을 보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조문국 왕은 절묘한 노적봉 계책을 창안하고도 적장에게 목숨을 잃었고, 나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이순신 장군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노적봉이 유달산 앞에 우뚝 솟아 있다.
ⓒ 정만진
그에 비하면, 이순신 장군의 노적봉 전술은 승리를 일구어 내었다는 점에서 차원이 다르다. 또, 금성산 노적봉의 1/10 수준 높이밖에 안 되는 해발 60m 바위산이라는 데에도 큰 차이가 난다. 결론은, 적이 얕잡아본 조문국 왕에 비해 이순신 장군은 왜군들이 너무나 두려워 해온 불세출의 영웅이었기 때문에, 왜소한 노적봉으로도 목포에서 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는 뜻이다.

목포시청 누리집이 간략하게 요약해서 소개하고 있는 노적봉 전설을 읽어본다. 

'노적봉은 해발 60m의 바위산에 불과하지만 왜적을 물리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담겨 있다. 정유재란 때 12척의 배로 불가능해 보였던 명량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전열을 재정비하는 동안 조선의 군사와 군량미는 턱없이 부족하여 바로 왜적이 쳐들어온다면 함락될 수밖에 없는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때의 노적봉은 아주 큰 역할을 하였다. 유달산 앞바다에 왜적의 배가 진을 치고 조선군의 정세를 살피고 있을 때 이순신 장군은 노적봉을 이용하여 위장 전술을 펼쳤다. 노적봉 바위를 이엉(볏짚)으로 덮어 마치 군량미가 산처럼 많이 보이게 하고 새벽에 바닷물에 백토를 풀어 밥 짓는 쌀뜨물처럼 보이게 하여 왜군들이 군사가 많은 줄 알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는 후로 이 봉우리를 노적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유달산 노적봉은 생김새가 마치 대장군의 얼굴처럼 생겼다. 노적봉 꼭대기의 울퉁불퉁한 암석 능선은 마치 대장군이 머리를 뒤로 젖히고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노적봉은 유달산 중턱의 이순신 장군 동상과 마주보며 서 있다. 장군의 동상이 응시하고 있는 바다 쪽 내리막 중턱에 노적봉이 불끈 솟아 있고, 그보다 한참 아래 바다에서 왜적들이 산더미처럼 쌓인 조선군의 군량미를 쳐다보고 있는 광경이 자연스레 연상되는 풍경이다.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는 이순신 장군 동상

노적봉에서 내려와, 계단을 올라 장군의 동상을 바라보며 올라간다. 장군은 금세라도 긴 칼을 뽑아들 듯한 자세로 약간 비스듬한 자세로 서 있다. 동상 받침돌에는 '忠武公(충무공) 李舜臣(이순신) 將軍像(장군상)'이라는 아홉 글자가 새겨져 있다.

 유달산 노적봉의 상단 모습. 대장군이 머리를 젖힌 채 하늘을 바라보는 형상이다.
ⓒ 정만진
 노적봉을 등지고 바라본 유달산, 계단 위에 이순신 장군 동상이 보인다.
ⓒ 정만진
동상에서 조금 높은 곳에 문화재자료 138호인 오포대(午砲臺)가 있다. 이는, 오포가 아니라 오포를 쏘았던 자리가 문화재라는 뜻이다.

오포는 정오포(正午砲)의 준말이다. 조선 시대 말기와 일제 강점기에는 시계를 가진 사람이 드물었으므로 관청에서 낮 12시에 맞춰  포를 쏘아 정오를 알렸다. 오포는 포탄 없이 화약만 넣어 쏘았는데, 전쟁 도구가 생활 도구로 이용된 특이한 면모를 보여준다.

 바다를 향해 서 있는 천자총통으로, 왼쪽에 노적봉이 보인다.
ⓒ 정만진
목포에서는 1909년 4월부터 경기도 광주에서 옮겨온 조선 대포로 오포를 쏘았다. 그 후, 1913년에 8월 포를 일본야포(野砲)로 바꾸었다. 지금까지 오포를 쏠 때 사용했던 조선대포는 송도신사(동명동)에 보관했다. 그러나 일제 말기 태평양 전쟁 때 둘 다 녹여서 군대 무기를 제작하는 데 보태기 위해 공출되었다.

전라남도는 1986년 11월 8일 유달산의 유서 깊은 오포대를 문화재자료 138호로 지정했다. 1988년 12월 목포애향협의회가 오포대의 문화재 지정을 기념하여 1609년에 제조된 천자총통(天字銃筒)과 후대의 차륜식(車輪式) 포가(砲架)를 오포대 자리에 복원했다.

 천자총통 발사 체험을 해볼 수 있는 유달산
ⓒ 정만진
오포대 외에도 유달산에는 특별한 전쟁 체험 현장이 있다. '목포 유달산 체험 프로그램'의 한 가지로 실시되는 '천자총통 발포 체험 현장'이 바로 그것으로, 오포대보다 좀 더 높은 곳에 있다.

천자총통은 최무선이 고려 말엽에 제작한 대장군포(大將軍砲)를 발전시킨 화포이다. 이름에 '하늘 천(天)'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 시대 대포 중 가장 큰 총통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천자총통 발포 체험은 매주 토요일, 일요일, 공휴일, 축제 기간의 10시∼13시에 실시된다. www.skygun.kr 또는 www.mokpo.go.kr에 사전 예약한 팀만 참가할 수 있으며, 참가비는 팀당 2만 원이다.

 목포진 터에 복원되어 있는 청사의 모습
ⓒ 정만진
 목포진 터를 알리기 위해 세워진 빗돌
ⓒ 정만진
 목포진 터 경내에 세워져 있는 두 기의 비석과, 안내 빗돌(맨 왼쪽)
ⓒ 정만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