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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의 기업] (20) 이교성 요셉 (주)신흥콘크리트 대표

참 빛 사랑 2016. 11. 25. 11:38

50년 시멘트로 쌓아올린 혁신·신의·나눔의 기업

▲ 전북 김제시 금구면 콩쥐팥쥐로에 있는 신흥콘크리트 본사 공장에서

콘크리트 제품들과 함께 한 이교성 대표.



▲ 전주시 완산구 서원로 이동교 옆에 있는 신축 심산장학문화재단 건물.




50년 세월을 시멘트와 모래와 함께 살아왔다. 성실과 신의는 지탱해 준 두 다리였고 창의와 혁신은 앞으로 나아가게 한 동력이었다. 전북의 향토 기업 (주)신흥콘크리트 대표 이교성(요셉, 78) 회장에게는 또 하나가 있다. 나눔과 배려다.



이 회장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수업료를 내지 못해 학교에서 쫓겨난 적이 있다. 결국, 자퇴했다. 20대 중반 전북 완주군청에서 촉탁직 회계 직원으로 있을 때 상사의 눈에 들어 상사가 운영하던 작은 벽돌공장 책임을 맡게 됐다. 3년 후 그는 월세 2만 원을 내는 조건으로 공장을 넘겨받았다. 벽돌공장 사장이 된 것이다. 졸업도 하지 못한 모교 이름을 따 ‘신흥공업사’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1968년 그의 나이 서른이었다.

수작업으로 한 번에 벽돌 5장, 블록 1장 찍어내던 시절이었다.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성실하게 살았다. 새벽 4시에 출근해 벽돌을 찍었고, 직원들이 퇴근하고 난 후에도 아내와 함께 자정까지 벽돌 틀 짜는 작업을 했다.



성실 그리고 품질 향상과 다양화

그러나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남보다 앞서는 것이 있어야 했다. 대다수 영세한 벽돌공장들이 겨울이 되면 날씨가 춥고 물이 얼어 일손을 놓고 있었을 때, 이 회장은 비닐하우스를 생각했다. 비닐하우스에서 벽돌을 찍고 양생을 했다. 봄이 되면서 업자들이 벽돌을 구하러 몰려들었다.

남보다 앞서 내다보고 결행하는 이 회장의 판단과 노력은 회사 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1970년대에는 증기 양생법을 도입, 향상된 품질의 벽돌과 보도블록으로 경쟁력을 키웠다. 1980년대엔 인터록킹블록, 경계블록, 호안블록 등으로 제품을 다양화해 판로를 뚫었다. 이런 창의와 혁신은 계속 이어졌다. 동종업계 최초의 ISO 9001 인증(1994), 중소기업 신지식인 인증(이교성 회장, 2001), 품질 경쟁력 50대 기업 선정(2005) 등을 비롯해 수십 가지의 제품 인증과 지적 재산권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전주시 고사동 남의 땅 400평에서 시작한 신흥공업사는 흐르는 세월과 함께 발전을 거듭했다. 신흥공업사는 (주)신흥콘크리트로 바뀌었고 자매회사인 (유)한스까지 두었다. 두 공장은 인근 김제시로 이전 확대해 각각 자리를 잡았다. 창업 48년이 된 지금 신흥콘크리트는 자매 회사와 함께 연 매출 170억 원의 탄탄한 향토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 회장은 회사에 열정을 쏟은 것 못지않게 사람을 소중히 여겼다. 창업 초기, 직원들이 외상 쌀을 사 먹는 것을 보고는 월급을 보름씩 두 번에 나눠 지급했다. 외상 쌀에 대한 이자 부담이라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공장 모퉁이에 허술하게 지은 비 새는 단칸방 슬래브 집에서 아내와 두 자녀와 함께 살던 때였다.

시멘트 대리점을 함께 운영하던 1970년대 중반, 252원 하던 시멘트 한 포대 값이 1000원, 1500원으로 폭등했지만, 그는 252원에 팔았다. 거래처와 신의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한번은 후배가 찾아와 급하게 15만 원을 빌려 달라고 해서 바로 돈을 찾아 주었는데, 얼마 후 땅문서를 갔고 왔습니다. 15만 원 값어치는 안 되지만 그거라도 받아달라는 것이었어요. 하천 부근 땅 153평이었습니다. 그런데 땅을 샀다는 소문이 나면서 주변 땅 주인들이 자기 땅도 사 달라고 하는 겁니다.”



직원들과 믿음 쌓기

그렇지 않아도 주택 지역에 있는 공장을 외곽으로 옮기려던 참이어서 땅을 샀다. 그런데 땅을 파 보니 모래땅이었다. 농부에게는 쓸모없는 죽은 땅이지만 콘크리트 공장에는 노다지와 마찬가지였다. 공장을 옮겼고 한동안 그 모래를 잘 사용했다.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는 대출을 받아 외국의 생산설비를 막 들여놓았을 때였다. 7억 5000만 원이었던 빚이 갑자기 18억 원으로 뛰어올랐다. 갚을 길이 막막했다. 형편이 어려워도 직원들의 월급을 제때에 지급하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터였다. 할 수 없어 50명쯤 되는 직원들을 불러 모아 다른 직장을 알아보라고 했다. 그러자 직원들이 나섰다. 상여금을 반납하고 월급을 동결할 테니 함께 회사를 살리자고 했다.

감동한 이 회장은 시가의 3분의 2에도 못 미치는 가격으로 개인 자산을 처분, 빚을 갚는 데 보탰다. 이렇게 해서 회사가 다시 안정을 되찾자 이 회장은 상여금을 전액 소급해서 지급했다. 당시 신흥콘크리트의 직원 상여금은 연 600%로 동종 업계 최고 수준이었다.

직원들에 대한 배려는 지금도 계속돼 종업원의 대학원 및 야간 대학 학비를 지원하고, 매년 전 직원 국내외 연수를 시행하고 있다. 또 모범 외국인 근로자들에게는 명절 고국 방문 때 항공료를 지원한다. 종업원들의 월급을 제날짜에 지급하는 전통은 48년 동안 이어지고 있다.

이것만이 아니다. 이 회장은 지역 사회와 교회 기관, 학교 등에 봉사기금과 장학기금 등으로 수십억 원을 희사해 왔다. 2008년에는 창업 40주년을 맞아 자신의 호를 딴 심산장학문화재단을 설립, 지금까지 고등학생과 대학생 374명에게 7억 7700만 원의 장학금을 지원했다. 지난 2월 19일에는 한때 신흥콘트리크 공장이 있었던 전주 이동교 옆 부지에 4층짜리 회관을 지어 재단에 기증했다. 이 회장은 2013년 전북애향 대상을 받았는데 결코 우연이 아니다.



요셉 성인을 닮은 삶

이 회장은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던 처가의 영향으로 1978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 사연이 특이하다. 회사가 전주 효자동에 있을 때인 1977년 효자동본당이 신설됐고 문정현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했다. 문 신부는 성전 신축을 추진하면서 대뜸 이 회장을 건축위원장에 앉혔다. 신자가 아니라며 고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성당을 다 짓고 봉헌식을 하면서 세례도 받지 않은 저에게 ‘요셉’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감사패를 주시더군요.”

이것이 계기가 돼 이 회장은 요셉으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세례를 받기 훨씬 전부터 이미 요셉이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묵묵히 그러나 듬직하게 평생을 헌신해 성가정의 수호자가 되고 노동하는 이들의 수호자가 된 성 요셉. 이교성 회장의 삶은 어딘지 요셉 성인을 닮은 듯했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