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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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랑스 파리 기적의메달 성당 과 외방전교회 성당

참 빛 사랑 2010. 3. 16. 16:41

 

 

 기적의 메달 성당 들어가는 입구

 

 

  

 

 기적의메달 성당내 기도중

 

 

 

 제대

 

기적의 메달

기적의 메달 (앞면과 뒷면)

기적의 메달(라틴어: Numisma Mirabile, 프랑스어: Médaille Miraculeuse) 또는 기적의 패성녀 가타리나 라보레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요청에 따라 만든 메달이다.

전 세계의 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일부 비 가톨릭 신자들)은 믿음을 갖고 착용하면 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을 수 있다고 여겨 기적의 메달을 목에 걸고 다닌다. 대개 메달은 갈색 스카풀라와 같이 착용하는 경우가 많다.

1830년 7월 18일 밤, 가타리나 라보레 수녀는 잠자던 중 자신을 부르는 어린 천사의 목소리를 듣고 깨어나 프랑스 파리 시뤼뒤박에 있는 수녀원 경당에 들어갔는데, 그곳에서 성모 마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마리아는 그녀에게 “하느님께서 너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려고 하신다. 그 사명은 많은 어려움이 있으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그 임무를 수행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반박을 받을 것이지만 은총을 받게 될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라.”하고 말하였다. 또한, “시대가 좋지 않다. 불행이 프랑스를 덮칠 것이고, 왕좌가 뒤집힐 것이며, 세계가 온갖 종류의 불행에 뒤집힐 것이다.”하고 알려주었다.

1830년 11월 27일, 가타리나 수녀는 저녁 묵상 시간에 성모 마리아의 두 번째 발현을 목격하였다. 장소는 마찬가지로 경당 안이었는데, 마리아는 양손으로 지구본을 떠받친 채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잠시 후 지구본은 사라지고 마리아의 내려진 손끝에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마리아가 밟고 서 있는 지구를 비추었다. 그리고 마리아의 주위에는 타원형의 판 같은 것이 나타났는데, 그 판에는 금으로 된 글씨로 “오! 원죄 없이 잉태되신 마리아님, 당신께 의탁하는 저희를 위하여 빌으소서. (Ô Marie, conçue sans péché, priez pour nous qui avons recours à vous)”라고 새겨져 있었다. 가타리나는 십자가M자도 보았는데 그 밑에는 가시관을 쓴 예수의 심장과 칼에 찔린 마리아의 심장이 있었다. 이는 전체적으로 타원형을 이루었고 열두 개의 별이 빛을 내며 주위를 돌고 있었다. 마리아는 “지금 본 것대로 메달을 만들도록 하여라. 이 메달을 지니는 사람들은 큰 은총을 받을 것이다. 그 은총은 믿음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풍성하게 내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가타리나는 고해 사제인 알라델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며 마리아의 메달을 만들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청원하였다. 알라델 신부는 2년의 세월 동안 가타리나의 일상생활을 매일 관찰하고 나서, 파리 대교구장에게 가타리나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성모 발현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가타리나의 청원이 받아들여져 메달이 대량 생산되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 메달을 통해 많은 치유와 회개가 있었다는 것이 보고되자 이때부터 이 메달을 “기적의 메달”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사람들에게 메달의 효험이 알려지자 곧 세계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기적의 메달에 의해서 일어난 수많은 기적 가운데 하나는 반(反) 가톨릭주의자였던 스트라스부르의 유대인 마리 알퐁스 라티스본느가 개종한 사건이다. 로마에 잠시 머무르던 알퐁스 라티스본느는 친구의 요청으로 마지못해 기적의 메달을 몸에 착용하였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우연히 산탄드레아 델레 프라테 성당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성모 마리아가 자기 앞에 발현하자 결국 세례를 받고 사제가 되었다.

성녀 가타리나가 성모 발현을 목격했던 경당은 사랑의 딸회의 파리 본부의 모원(母院)에 자리 잡고 있다. 경당 안에는 사랑의 딸회의 공동 창설자인 성녀 가타리나 라보레와 성녀 루도비카 드 마릴락의 시신들이 안치되어 있으며, 매일 참배일마다 가톨릭 신자들의 방문이 계속되고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자신이 사용할 문장으로서 단순한 십자가의 오른쪽 아래에 M자를 넣는 작은 변화를 주었다. 이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발아래에 있던 성모 마리아를 상징한다.

 

 

 파리 외방전교회 성당과 지하 전시관

 

 

지하 기념관 내 석판에 한국 순교 성인 명부가 있음 

 

 

 외방 전교회 성당 제대앞

 

 

 

파리 외방 전교회 성당 제대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성모자 상

 

 성탄 구유

 

 외방 전교회 건물과 뒷뜰

 

 

 

 

한국 순교 성인 현양 비 (서울 명동 주교좌 교우 기증 기념)

성인 김대건 사제와 정하상

 

 

파리 외방 전교회
교황청 포교성성이 1658년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포교상의 보호권을 분쇄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의 포교열을 이용하여 선교단체를 창설하고, 주로 아시아 지역에 종신 선교사를 파견한 선교단체.
이 선교단체의 특징은 선교사들이 일정지역에 종신토록 머물면서 그 지역 회장을 임명하여 포교에 활용하고, 그들 중 성직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방인(邦人) 성직자를 양성함으로써 그들에 의해 교회가 운영될 수 있도록 한다는 데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가 한국에 처음 진출한 것은 1827년 9월 1일 사제를 요청하는 한국 교우들의 편지를 접한 교황이 파리 외방전교회에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에 한국에서는 외국인 입국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선교는 곧 고난과 순교를 의미했다. 그러나 당시 타이에서 보좌주교로 있던 브뤼기에르 주교가 한국선교사를 자원했고, 1831년 9월 교황 그레고리 16세에 의해 초대 조선대목(朝鮮代牧)으로 임명되자 즉시 입국을 서둘러 만주에 도착했으나 입국하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러나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에 제2대 조선대목인 앵베르 주교와 샤스탱 신부가 입국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본래 목적에 따라 3명의 소년을 마카오에 보내어 교육을 받게 함으로써 1845년 최초의 한국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배출했다. 1839년 기해사옥(己亥邪獄) 이후 조선정부의 지속적인 박해로 제3대 조선대목인 페레올을 비롯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계속 순교했고, 1866년 병인(丙寅) 대박해가 일어나자 모두 순교하고 살아남은 3명의 선교사도 중국으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기해사옥). 그후 1886년 조·불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자 파리 외방전교회의 선교사들은 포교활동에 대한 자유를 보장받게 되고 한국 천주교의 토대를 마련했다. 1911년에는 대구대목구를 분할하여 파리 외방전교회의 드망주 신부가 초대 대목으로 취임했고, 이후 원산대목구, 평양·연길·전주·광주 등의 분할을 설정하여 1962년 한국인에 의한 정식교계제도를 수립할 수 있게 했다. 이 전교회는 현재 가톨릭신학대학의 모체가 되는 신학교를 이미 1885년 강원도 원주 부흥골에 형성했으며, 이로써 한국 성직자를 배출하여 천주교회의 근간을 마련했다. 또한 파리 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은 본부에 각종 서신과 보고서를 통해 한국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의 천주교회사를 세계에 알렸다. 제8대 조선대목 뮈텔 주교는 오랜 세월 동안 한국순교자들의 사적을 조사함으로써 1925년 이들을 복자(福者)의 품(品)에 오르게 했다. 이같이 파리 외방전교회의 한국 전교역사는 곧 한국천주교 형성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한국천주교회의 초창기 발전은 물론 교회를 통해 한국민족과 고락을 같이 한 전교회는 조선조의 박해와 일제의 탄압을 받으면서 활동하다가 1942년 서울대목을 방인 노기남 주교에게 인계했고 1944년부터는 사목활동의 책무를 점차 방인 성직자에게 인계했다. 6·25전쟁 당시에는 12명의 회원이 희생당했지만 1953년부터 다시 선교사들이 파견되어 활동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에는 20여 명이 활동하고 있지만 독자적으로 활동하기보다는 한국 천주교회의 중요한 사업계획에 협조하면서 활동하고 있다. 파리 외방전교회는 창립 후 오늘날까지 아시아 지역에 약 4,000여 명의 선교사들이 파견되었는데 그중 170여 명이 한국에 파견되었으며, 그중 24명의 선교사가 한국에서 살해되었다. 또한 2,000여 명의 현지인 성직자를 양성했는데 그중 한국인이 100여 명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