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기가 처음 걸을 때 부모는 앞에서 두 손을 펴고 기다리며 행여 넘어질까 노심초사하며 마음을 졸인다. 부모는 한 걸음씩 아장아장 걸어오는 아기를 대견해하며 가슴에 안아준다. “아이고, 잘했다, 내 새끼~”
우리는 하느님께서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는가? 보통 저 먼 하늘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나. 혹은 성경이 전하는 과거 이야기 속에 계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그래서인지 지금 나의 삶과는 무관하게 저 멀리 계시는 분, 지금 내가 겪는 고통과 무거운 삶의 짐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분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성경이 전하는 하느님은 결코 그런 분이 아니시다. 성경의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이시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하며 비인간적인 취급을 받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을 듣고 응답해주셨다. 광야에서 힘겨운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노예살이로 돌아가고 싶은 생각도 가졌고, 하느님께서 계시지 않는 것으로 여겨 우상을 숭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과 하신 약속을 잊지 않으셨고, 회개하고 돌아오는 백성을 계속해서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다. 하느님은 당신 약속에 충실하신 분, 약속을 반드시 지키는 분이셨다.
신약에서도 하느님은 약속의 하느님으로 드러나신다. 나자렛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를 보내시어 구원을 약속하셨다.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께 이렇게 인사드렸다. “행복하십니다. 약속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루카 1,45) 이 말씀에는 암시가 깔려 있다. 마리아의 삶에 고난과 시련이 도사리고 있다는 암시말이다.
실제 마리아의 삶은 고통의 연속이었다.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해야 했고, 성전에서 어린 예수님을 잃기도 했으며, 동족들의 모함을 받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는 아드님의 모습을 지켜보셔야 했다. 그러나 마리아는 생애 끝까지 제자들과 함께 남아 기도하셨고, 결국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하늘에 오르실 수 있었다. 하느님의 약속을 끝까지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리아의 삶만이 아니라 우리 삶도 그렇지 않나. 우리 삶은 고통의 연속이며, 위기와 시련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는 약속의 하느님을 믿는다. 우리 안에 큰일을 시작하신 분께서 반드시 그 일을 마치실 것이다. 삶의 시련은 끊임없이 우리의 희망을 짓누르려고 하지만, 신앙은 하느님의 약속을 기억하게 하며, 우리가 계속해서 약속의 하느님을 믿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희망이란 이름을 지닌다. 우리는 희망의 하느님을 믿는다. 삶이 희망차다는 것, 하느님께서 우리 삶을 완성으로 이끄신다는 것, 그렇기에 우리가 겪는 고통과 시련, 위기는 우리의 희망을 단련시키고 성장시키기 위한 통과의례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성탄은 희망의 하느님, 약속의 하느님이 오심을 맞이하는 축제다.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접 인간이 되어 오신 하느님, 가장 작고 연약하고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오시어, 가난한 우리 마음을 위로하시며, 우리 마음에 온기를 전해주시고 상처를 낫게 하시며 희망의 여명을 새롭게 밝혀주는 분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저 앞에서 두 손 벌려 우리를 기다리신다. 우리가 쓰러질까 노심초사 마음 졸이며. 그러나 우리 대신 걸어주지 않으신다. 우리가 스스로 당신께 걸어가도록 기다리신다. 넘어져도 괜찮다. 다시 일어서면 되니까. 우리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시는 하느님을 향해 용기를 내어 일어나 계속 걸으면 된다.
한민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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