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려견’ 가구 1000만 시대. 그러나 많은 경우 자칫 개에게 인간 특성을 부여하거나 인간의 감정적 파트너 역할을 과도하게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OSV
‘외로운 나라 한국이 개를 인생의 반려자로 삼다’라는 제목으로 최근 뉴욕타임스가 한국의 반려견 문화를 집중 조명했다. 갈수록 출산율이 낮아지는 나라, 독신이나 무자녀가 증가하는 나라, 얼마 전만 해도 개를 식용하던 나라가 강아지를 자녀나 손자로 받아들이는 나라, 개를 애지중지하는 가족으로, 그리고 인생의 파트너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뉴욕타임스는 사람과 유사하게 반려견 장례식을 치르는 영상을 올려놓고 다른 구체적인 사례까지 세세하게 언급한다. 견주는 38달러짜리 낡은 패딩을 입으면서 자신이 키우는 개에게는 150달러짜리 새 재킷을 입히고, 자신은 냉장고에 있는 오래된 음식을 먹으면서 개는 신선한 닭가슴살을 먹인다. 아기 유모차보다 개모차가 더 잘 팔리는 한국의 쇼핑물, 개를 위한 데이케어·트레이너·의류·장례사·미용사 등이 늘어나면서 펫코노미(pet-economy)가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고 전한다. 신문은 오늘날 한국에서의 개에겐 사람처럼 높은 소비를 하면서 돌봐야 하는 가족 구성원이라는 것을 알린다.
‘답다’라는 말은 자기 동일성(self-identity)과 관련 있다. 사람은 내면의 자아와 외적 행동이 일치할 때 그리고 본연의 모습과 욕구를 그대로 인정하고 진정성을 추구할 때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낀다. 하지만 ‘답지 못한’ 행동을 하면 인지 부조화 상태에서 심리적 불편감을 느끼기도 한다. 그래서 ‘나다움’을 인정해주고, 나다움으로 관계를 맺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최고의 행복감을 느낀다.
개도 마찬가지로 개답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안정감을 느끼지 않을까 싶다. 개에게 인간의 특성을 부여하거나 의인화하면서 지나치게 인간처럼 대우하는 경향이 있다. 동물은 동물만의 방식으로 생존하고 존재한다. 그런데 개가 불편하고 고통스러울 수 있는 옷을 입히거나 화장품이나 액세서리 등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개의 신체적 불편함을 간과한 채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과시형 패션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돋보이기 위해 반려견을 도구화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은 인간답게 사랑하면서 사랑받고, 개는 개답게 사랑하고 또 사랑받아야 한다. 인간과 개는 분명 다르다. 칸트는 인간을 이성적인 존재로 규정한다. 스스로 목적을 설정하고 도덕적 결정과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존재다. 그렇기에 인간을 인간답게 사랑한다는 것은 상호존중과 배려를 바탕으로 관계하면서 상대방의 자유와 선택을 존중한다.
하지만 개는 감각적이고 본능에 충실한 존재다. 개를 개답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의 본능적 필요와 본성을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은 미숙한 아기로 태어나 누군가를 돌볼 수 있는 독립적인 어른이 된다. 그러면서 서로 정서적 유대를 나누고 상호의존을 하면서 성장하고 성숙해진다. 하지만 개는 처음부터 죽을 때까지 돌봐야 할 아이 같은 존재다.
그런데 인간은 개에게 인간의 감정적 파트너 역할을 기대하고 성숙한 사람처럼 대하면서 심리적 만족을 얻으려 한다. 인간의 복잡한 감정적 욕구를 개에게 투사해 감정적 보상을 얻으려 하거나, 인간이 원하는 방식대로 개가 행동하게 하거나, 혹은 개가 자신을 사랑하고 이해한다는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것은 개답게 돌봐주는 일이 아닐 것이다.
개는 사람이 될 수 없다. 그런데 왜 개를 ‘의인화’하려고 할까? ‘개 엄마’ ‘개 아빠’의 호칭이 자연스러운 시대다. ‘우리 아이예요.’ 개모차를 확인하기까지는 정말 아이인 줄 알았다가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란 적이 있다. 가끔은 개를 인간관계의 대체물로 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묻게 된다. 뉴욕타임스가 뽑은 제목을 곱씹어본다. ‘외로운 나라, 한국이 개를 인생의 반려자로 삼다.’ 혹시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오는 피로감과 정서적 결핍, 외로움을 해소하기 위해 반려견에게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감정적 보상을 얻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영성이 묻는 안부>
아내와 남편을 ‘반려자’라고 합니다. 개도 ‘반려견’으로 불리면서 위상이 꽤 높아졌지요? 반려견이 인간 가족 구성원 안에 깊숙이 들어왔습니다. 때론 집착의 정도가 가족에 대한 집착 이상인 듯 보입니다. “반려견에게 세례를 주세요”, “저의 반려견 치유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교회에서 반려견 장례식을 치러주세요”, “저의 강아지를 천국에서 다시 만날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들을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사람과 똑같이 장례식을 치르고 반려견의 유골함을 집에 보관해두면서 기억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요. 반려견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 자칫 종교적이고 정서적인 구원의 대체물로 작용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동물이 아닌 영적 동반자로서 마치 초월적 세계로 연결해준다고 느끼는 것은 아닌지요? 매일 특정 시간에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며 보내는 시간이 신성한 행위처럼 생각되는 것은 아닐까요? 매일 SNS에 반려견 사진을 올리고 산책 노트를 기록하는 하루의 리추얼(ritual, 의식)로 정서적 안정감을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개의 의인화, 개를 사람처럼 대우한다고 더 개를 사랑하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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