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순교 복자 기념일(29일) - 신앙 선조들은 어떤 삶을 살았나
▲ 124위 복자화
29일은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이다.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오른 124위는 1791년 신해박해 3위, 1795년 을묘박해 3위, 1797년 정사박해 8위, 1801년 신유박해 53위, 1814년의 1위, 1815년 을해박해 12위, 1819년의 2위, 1827년의 정해박해 4위, 1839년의 기해박해 18위, 1866년과 1868년의 병인-무진박해 19위, 1888년 기축년 1위로 한국 천주교 박해 시대의 역사를 증거하는 순교자들이다.
124위 순교 복자 기념일을 맞아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은 어떻게 고난을 이겨내고 신앙을 지켰는지를 살펴본다.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조선 정부는 왜 가톨릭을 박해했나
조선 정부는 가톨릭을 사교(邪敎)로 규정했다. 그 이유는 가톨릭이 조상 제사를 금지하고, 하느님을 대군대부(大君大父)로 여기면서 세속의 임금과 부모의 권위를 상대화시켰기 때문이다. 또 신분제 폐지와 천당지옥설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다른 사람의 재산을 빼앗고 색욕에 몰두해 기존의 사회 윤리 질서를 파괴하는 종교라고 배척했다.
덧붙여 조선 후기 정치 세력 간의 갈등 또한 가톨릭 박해를 일으킨 요인으로 작용했다. 1801년 신유박해는 노론 벽파와 공서파 남인이 노론 시파와 친서파 남인을 제거하는 과정으로, 1839년의 기해박해는 벽파인 풍양 조씨가 시파인 안동 김씨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천주교 박해를 이용했다고 역사학자는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조선 후기에 도입된 가톨릭은 종교적인 이유라기보다 정치ㆍ사회적인 요인으로 인해 끊임없이 박해의 위협 속에 있었다.
이에 신앙 선조들은 가톨릭(천주교)이야말로 참된 길이요 참된 교리이며 참 종교라며 죽음으로 증거했다. 그러면서 신앙 선조들은 박해의 주체인 조정과 타협하고 종교의 자유를 모색하는 노력을 기울이는가 하면, 오로지 신앙의 힘과 은총으로 박해를 견디어 냈다.
애덕 실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은 신앙을 따를 것인지, 세상을 따를 것인지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에 박해와 죽음이 놓여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망설임 없이 그리스도를 택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순교자의 모범을 따르는 것은 신앙에 도전을 해오는 수많은 세속적 가치에 맞서 그리스도의 가치를 지켜내는 일이다. 그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순교자들의 모범은 ‘애덕’(愛德)이다. 애덕은 사랑하는 데만 머무르지 않고 나눔이 뒤따르는 실천적 삶이다. 순교자들은 교리의 가르침을 그대로 살았던 사람들로, 애덕의 실천자이다.
박취득(라우렌시오, ?~1799) 복자는 관장에게 “얼마 안 되는 제 재산을 헐벗고 곤궁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기 위해 쓰고 있으니, 그것은 재산을 쓸데없이 낭비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하며, 천주교 신자들의 애덕 실천의 정신을 증언했다.
현실에 충실
순교자들은 삶의 목표를 천국에 들어가는 것에만 두지 않았다. 그들은 천국을 갈망하면서 신앙인으로서 현실의 삶에 충실했다. 그들은 현실의 삶이 순교를 준비하는 도량으로 인식했다.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웃에게 헌신하고, 매 순간 하느님을 갈망하며, 박해의 고통을 이겨냈다.
최조이(바르나바, 1790~1840) 복자는 물질적인 나눔뿐 아니라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을 위로했다. 또 이재행(안드레아, 1775~1839)과 박사의(안드레아, ?~1839) 복자는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애긍희사에 힘썼다.
이처럼 현실의 삶에 충실한 것은 순교자들에게 있어 신앙의 실천일 뿐 아니라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삶의 보증이었다.
공동체 신앙생활
박해 시기 신앙 선조들은 교우촌을 이뤄 살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을 충실히 살았다. 신분에 따라, 가진 것에 따라 상대방을 구분 짓고 차별하며, 이웃의 고통에 눈감는 것은 그들이 배운 신앙이 아니었다. 그들은 당대의 엄격한 신분사회를 뛰어넘어 한 형제자매로 서로를 존중했고, 서로를 보살폈다. 박해시기 교우촌이 신앙 안에서 한마음 한뜻이 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던 ‘초대 교회의 공동체’(사도 4,32-37)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앙 공동체는 혈연 공동체인 집성촌이나 일반 주거 집단과 확연히 구분되는 공동체였다. 박해 시기 신자들은 신앙을 실천하기 위해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가 공동생활을 했다. 교우촌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교회의 삶의 자리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공동생활은 하면서 가진 바를 공유했다. 또 인간의 존엄성에 기초해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 없이 하느님 안에서 동등하고 고귀한 존재임을 존중하고 살았다.
정오품으로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정랑을 지냈던 홍낙민(루카, 1740~1801) 복자는 자신의 노비들을 해방시켜 주었고, 백정이었던 황일광(시몬, 1756~1802) 복자는 “나에게는 천당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나 자신의 신분에 비해 지나친 대우를 받는 것으로 보아 지상에 있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내세에 있다”며 가톨릭 신자임을 자랑했다.
온 삶으로 신앙을 증거
신앙 선조들은 주님을 만나 삶 전체가 변한 기쁨을 저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올라 그 기쁨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죽음을 아랑곳하지 않고 온 세상에 외친 선교사들이다.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7~1801) 복자는 관장 앞에서 “예수를 알기 때문에 배교를 거부한다”고 증언했고, 김종한(안드레아, ?~1816) 복자는 죽음을 앞둔 처지에서도 형수에게 “언제나 예수님처럼 행동하라”고 권유했다.
김시우(알렉시오, 1781~1815) 복자는 자신을 신문하는 대구 감사에게 “우리 주님 예수께서는 온 세상 모든 인류의 영혼을 구원하시려고 고통받고 죽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를 베푸신 분을 섬기지 않는 자를 어떻게 사람으로 여길 수 있겠습니까? 감사 나으리도 예수님께 감사드리고 예수님을 흠숭하고 천주교를 믿으십시오”라고 회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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