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얼굴이 무척 어두워 보였다. ‘무슨 안 좋은 일이 있나’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누군가 속삭이듯 말했다. “수녀님, 오늘 J씨 생일….” 순간 아차 싶었다. 우리는 직원들의 축일이나 생일 때면 함께 축하한다. 그런데 J씨의 생일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 것이다. 부랴부랴 케이크와 선물을 준비했다. 그리고 미안한 마음에 더 크게 손뼉을 치고 노래를 부르면서 축하를 해주는데, 그는 여전히 표정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아주 작은 소리로 “감사하다”고 답했다. 커다란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생일을 기억해주지 못한 것은 미안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에는 농담도 잘하고 명랑한 여성이어서 더 당혹스러웠는지도 모른다.
다음 날 회의 끝에 J씨는 할 말이 있다며 입을 열었다. 차분하지만 약간 떨린 듯했다. “어제 제가 보인 태도에 대해 죄송하게 생각해요” 하면서 잠시 머뭇거리더니 “저에게는 어린 시절 버림받은 트라우마가 있어요. 그래서 그런 감정이 생기면…” 하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 슬픔을 토하는 그의 진심 어린 고백에 우리 모두 숙연해졌다.
그는 입양아다. 몇 년 전 친어머니를 찾으러 간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단다. 자신의 존재가 사랑이었는지, 사고였는지. 다행히 친어머니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듣고 “그러면 됐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돌아왔다고 한다. 그에게는 ‘사랑’이었다는 말이 엄청난 위로가 됐을 것이다. 하지만 버림받았다는 아픈 기억을 건드리는 상황이 생기면 영락없이 깊은 수렁에 빠져버린다.
우리의 몸은 트라우마를 기억한다. 몸이 상처를 기억하면 이성의 뇌가 자동으로 꺼지고 싶고 깊은 감정의 늪에 빠져든다. 그리고 과거의 상처가 고스란히 현재에 일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게다가 J씨는 늘 자신의 존재 근원에 대한 물음을 안고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생일’이 누구보다 특별하고 절실했는지도 모른다. 우리가 그의 생일을 챙겨주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이 들었다.
과거에 버림받았던 내면의 아이가 현실로 되살아나 죽을 것 같다며 발악을 하였으리라. 그것은 강렬한 절망을 불러왔고 과거 상처로 인한 분노가 폭풍처럼 몰아쳐 현실을 삼켜버렸을 것이다. 자신이 오십 넘은 어른이라도 동료들이 실수해서 잊은 것이지 자기를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도, 그리고 동료들이 엄마도 가족도 아니니 실망하지 말라는 이성 스위치가 꺼졌을 것이다.
가끔은 그럴 때가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일에 지나치게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어떤 때는 몇 날 며칠 힘들었던 상황을 재현하면서 곱씹고 또 씹어 현재 일어나는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상처다. 몸과 마음이 계속 아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정신적인 고통은 신체적 불균형으로 이어져 소화가 안 되거나 복통이 생길 때도 있다.
우린 저마다 크고 작은 트라우마를 가지고 산다. 그런데 그 무언가에 의해 아픈 상처가 건드려지면 경보시스템이 울려 감정의 격동에 휩싸인다. 그럴 때면 ‘네 잘못이 아니야’, ‘지나간 일이잖아’, ‘그렇게 화날 일이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이성의 뇌가 정상적으로 작동이 안 된다. 그렇기에 과민하게 반응하고 격하게 화를 내고 우울해지면서 주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J씨의 과민반응에 ‘왜 저래?’라고 판단했지만, 그는 과거의 상처가 지금 일어나는 것처럼 재생되고 있었다. 다행히도 J씨는 자기 몸에서 일어나는 신호를 제대로 관찰했고 정확하게 마음의 언어로 표현해주었다.
고마웠다. 그 순간 과거에 갇혔던 그의 상처가 현재로 걸어 들어와 나의 상처까지 회복되는 느낌이었으니까.
성찰하기
1. 극심한 분노는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닫게 해요. 그러면 그 어떤 길도 보이지 않아요.
2. 그러니 부정적인 감정이나 스트레스가 올라올 때 지나치게 당황하지 않고 나의 감정과 몸에서 일어나는 반응을 살피는 습관을 키워요.
3. 과거의 상처는 현재에서만 회복할 수 있어요.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현재 나와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에게 용기 있게 밝혀요.
<살레시오교육영성센터장, 살레시오수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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