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새벽잠을 설친다, 고달픈 삶이 눈뜬다
불평등 심화와 빈곤 확대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비정규직 1위, 노인 빈곤율 1위, 불평등 3위, 빈곤율 2위라는 순위는 우리 사회의 그늘진 자화상이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공감을 잃은 지 오래며 ‘흙수저 금수저’ 논란도 철 지난 이야기일 뿐이다. 사회 약자들을 위해 국가와 종교ㆍ민간단체가 힘을 쏟지만 ‘약자’들은 구조적 빈곤의 쳇바퀴에서 오늘도 허덕인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현대 세계의 복음 선포에 관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에서 ‘폭력을 양산하는 불평등을 거부합시다’(59-60항)라고 말한다. 낮은 곳에 임하실 아기 예수를 기다리는 대림시기, 그리스도인은 불평등을 거부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곁을 스쳐 지나갔을 가난한 이웃들의 삶을 4주에 걸쳐 묵상해 본다.
내가 자는 새벽, 누군가는 깨어 일한다
서울 중림동약현성당 입구에서 30여m 떨어진 곳에 건설 노동일을 주선하는 인력사무소를 찾았다. 하루 노동일을 찾는 사람들이 새벽 5시면 이곳에 모인다. 새벽 장사를 위해 문을 연 상점 안 시계가 새벽 4시 30분을 가리킨다. 인력사무소는 아직 적막에 싸여있고 생선과 채소 등을 진열하는 상인들의 손놀림만 분주하다. 30분쯤 흘렀을까, 저 멀리 최 빈첸시오(50)씨의 모습이 보인다.
최씨는 “여기는 사무소를 통해 연락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며 “일당 잡부를 골라 봉고차에 태우는 인력시장은 서울역 인근에서 열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30년 넘게 막노동을 하며 잔뼈가 굵었다. 알코올중독으로 노숙 생활을 한 10여 년을 빼곤 꾸준히 일했다.
일자리를 찾아 이곳에 오는 이들 가운데는 인근 쪽방이나 고시원에 살거나 ‘깡통’에 사는 이가 많다. 깡통은 지하도를 일부 막아 지은 겨울철 노숙인 쉼터를 이르는 속어다. 저마다 사는 곳은 달라도 준비물은 비슷하다. 옷가지를 담을 수 있는 가방과 모자, 발을 보호하는 안전화이다.
첫 시내버스의 굉음이 도시의 적막을 깬다. 모자를 눌러쓰고 어깨에 가방을 멘 사람들이 하나둘 어둠을 뚫고 사무소 앞으로 온다. 삼삼오오 모였지만 다음에 볼 기약이 없어서일까 특별한 대화는 없다. 자판기 커피에 몸을 녹이고 담배를 피우며 몇 마디 주고받을 뿐이다.
“현장에서 일 잘하는 사람 같이 오라고 그랬는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최씨는 오늘 서울 강동구 상일동 아파트 건설 현장에 함께 갈 사람을 만나려고 이곳을 찾았다. 사무소에 올라간 최씨가 사장과 일자리를 구하러 이곳을 찾은 사람과 함께 내려온다. 사장과 몇 마디 나눈 최씨가 날 선 반응을 보인다. “신참을 소개하면 어떡해요. 난 몰라~ 그쪽 책임자에게 직접 전화해요.” 사장이 휴대전화기를 들어 짧은 통화를 마치고 쏘아붙이듯 말한다. “에이~시. 말해놨으니 빨리 가봐.”
날씨만큼 분위기도 차갑게 가라앉는다. 그래도 신참 노동자는 오늘 하루 허탕을 치지 않아 다행인 표정이다. 최씨와 신참이 공사 현장을 향해 분주히 발걸음을 옮긴다. 그들 옆을 스쳐 지나는 공항버스 안 승객들 모습과 대조적이다. “남들 잘 시간에 일 다니려면 힘들지 않으세요? 해외로 여행가는 분들도 있는데….” “노숙하다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있고 젊어서 큰집(교도소)에 간 적도 있었죠.” 최씨는 삶이 벽에 막히면 체념하며 넘어가고, 일이 틀어지면 포기하며 살았다고 했다. “더 나쁜 시절도 있었다”며 자기를 위로하고 “술이 있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다”고 답하는 그의 말투가 덤덤하다.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전철역에 들어왔다. 최씨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킨다. “저기 노가다 통근 전철 왔네. 이게 노동 일 가는 사람들이 주로 타서 그렇게 불러요.” 전철 종점에는 최씨와 일행의 하루 일터가 있다. 하루 일당 11만 6천 원. 저마다 살아온 사연은 달라도 목적은 같다. 전철 문이 닫히고 최씨 일행을 실은 열차가 상일동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다.
▲ 이른 새벽, 손수레를 끌고 폐지를 주우러 다니는 할머니. |
▲ 반나절 모은 폐지로 1200원을 번 할머니. |
깡통 함부로 차지 마라, 그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다
초겨울로 접어든 새벽 6시 40분.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고물상 철문이 열리자, 나이 든 어르신들이 한 짐씩 끌고 들어온다. 나이 든 어르신만 있는 것도 아니다. 모자를 눌러쓴 중년 남성도 몇몇 보인다.
손수레, 오토바이, 낡은 차에 실려온 각종 폐지와 찌그러진 고철 덩어리, 재활용품이 쏟아진다. 손수레를 ‘거리 청소기’처럼 끌고 다니며 세상 사람들이 쓰다 버린 물건들을 쓸어 담아왔다. 이들은 폐지 줍는 일로 노후를 보낸다. 고물상에는 수명을 다한 찌그러진 생활용품들이 켜켜이 쌓여있다.
모아온 폐지의 무게를 달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홍화순(가명, 74) 할머니에게 물었다. “아침 식사는 하셨어요? 몇 시에 일어나신 거예요?” 오랜만에 듣는 안부였을까. 환하게 웃는다. “일어나자마자 온 거여. 밥을 어떻게 먹고 와. 가서 할아버지 밥 차려줘야지!”
고물상 주인이 무게를 단 후 2000원을 쥐여준다. 폐지는 1kg에 50원을 쳐 준다. 2000원을 받아든 할머니는 폐지를 모아둔 게 또 있다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빈 수레를 끄는 할머니의 다리가 절뚝인다. 할머니는 폐지를 줍기 전, 서울 여의도에 있는 고층빌딩에서 카펫 청소하는 일을 10년 했다. “내가 6년 전부터 폐지를 줍다가 최근에 다리 수술 때문에 한동안 못 하다가 다시 하는 거야. 1000원이라도 벌어야겠다 싶어서.”
퇴행성 관절염을 앓는 할머니는 빈 종이상자가 쌓인 편의점과 슈퍼 앞을 지나치지 못했다. 낮에 주은 폐지를 저녁에 정리하고, 새벽에 눈 뜨면 고물상에 갖다 판다.
할머니는 가다가 쓰레기통 앞에 멈춰 선다. 재활용품을 버린 쓰레기통에 손을 밀어 넣었다. 누군가 먹다 버린 커피 캔 두 개가 나온다. “이게 돈이 되는 거여. 캔은 1kg 800원이나 쳐 줘. 종이도 백지나 신문, 책이 돈이 돼. 백지랑 신문은 1kg에 100원이여.” 집 앞에 도착하자, 모아 놓은 폐지 한 수레가 더 기다리고 있다. 주름진 맨손으로 거친 종이상자를 정리한다.
할머니는 1남 3녀를 두었다고 했다. 그러나 명절에 오지 말라고 한 지 오래다. “자기들도 각자 먹고살기 바빠…. 딸이 많아 좋으냐고? 딸도 딸 나름이여.”
이야기를 나누는 새, 다시 고물상에 도착했다. 두 번째 수레에서 내린 낡은 폐지로 1200원을 받았다. 이날은 3200원을 용돈으로 벌었다. “할아버지 약값이랑 내 병원비가 얼마나 많이 나오는지 몰라. 어디 다리 수술이라도 해주는 곳이 있으면 좋겄어.”
할머니는 “노인네 이야기 듣느라 왜 이렇게 시간을 낭비하느냐”면서 얼른 출근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 늦은 밤 카페 아르바이트생 안씨가 손님을 응대하고 있다. |
의자에 앉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자들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7시 경기도 김포시의 한 카페. 친구들과 담소를 즐기는 사람들과 공부하는 사람들 사이로 카페 직원들의 발걸음이 분주하다. 퇴근 후 저녁의 여유를 즐기는 손님들의 모습과 대비된다.
마감 담당인 안형준(가명, 28)씨도 이 카페 아르바이트생 중 하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난에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다 보니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다. 매대 앞으로 가 말을 건네자 안씨가 비어있는 탁자를 가리킨다. “죄송합니다. 지금은 바쁘니 저기에 잠시만 앉아계시겠어요. 원래 이 시간이 제일 정신없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짬을 낸 안씨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한 손에는 휴지통을 정리하기 위한 커다란 봉투가 들려 있다. “저녁 늦게까지 일하면 피곤하시지 않으세요?” “중학생 때부터 계속 이 시간대에 일해서 그런지 괜찮습니다.” 대답하는 와중에도 휴지통 주변을 정리하는 안씨의 손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안씨는 학비를 벌고자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었다. 고깃집 불판 닦기와 숯불 나르기, 피시방, 영화관까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했다. 학교에 다녀야 했고 야간 아르바이트가 얼마라도 더 받을 수 있기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카페에서 일하기 전까지는 편의점에서 날을 세워가며 일을 했다. “야간에 일하면 졸릴 때도 있지만, 아르바이트 전에 자기 시간도 가질 수도 있고 나름 괜찮아요.”
안씨가 일하는 카페는 밤 11시가 넘어서야 문을 닫는다. 시간이 갈수록 한산한 카페와 달리 카페 밖 거리는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이 늘어난다. 술자리를 마치고 이동하는 사람들과 술을 못 이겨 비틀거리며 걷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창 너머를 보던 안씨는 “오늘은 취객이 카페를 찾지 않아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마감 시간 때 종종 취객들이 찾아와 행패를 부리는 일이 있습니다. 편의점에서 일할 때는 싸우는 손님들을 말리느라 진땀을 뺀 적도 많았죠.”
밤 11시, 카페 영업은 끝났지만 마감 업무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안씨는 여기저기 널브러진 머그잔들을 모아 싱크대로 향한다. 쟁반 가득 머그잔을 든 손이 위태롭게 보인다. 한쪽에서는 다른 직원이 설거지를 시작한다. 일회용 컵 사용 규제로 생긴 풍경이다. “고생이 너무 많다”라는 말에 안씨가 손사래 치지만 얼굴에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래도 카페 아르바이트는 처우가 좋은 편이죠. 상대적으로 안전하고 월급 떼어먹는 일도 없고….”
카페 문을 잠그러 가던 안씨는 막차 놓치기 전에 얼른 출발하라고 기자를 걱정했다. 자신은 취업에 성공해 지난주 일을 그만둔 동료 송별회 자리에 참석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저도 번듯한 직장에 취직해서 송별 인사 좀 받아봤으면 좋겠네요.” 웃으며 말하는 안씨의 표정에 부러움과 쓸쓸함이 교차한다.
▲ 11월 21일 서울 용산구 동자동 쪽방 골목. 저녁이 되자 일을 마친 쪽방 주민들이 하나 둘 귀가하기 시작한다. |
인생의 무덤이 된 보금자리
“우리 같은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요.”
쪽방 미닫이문을 연 김기현(가명, 70)씨가 인사를 건네며 말했다. 어깨너머로 한 평 남짓한 쪽방이 한눈에 들어온다. 누덕누덕 기운 낡은 바지처럼 천장에 옷가지가 어지러이 매달려 있다. 방 한편에 놓인 브라운관 TV에서 알록달록한 화면이 쏟아져 나온다. 토크쇼 패널들의 웃음소리가 차가운 쪽방 안을 가득 메웠다가 사라진다. 이불 위에 플라스틱 도시락을 펴놓고 먹던 김씨가 저녁을 끝마쳤는지 빈 도시락통을 비닐봉지에 구겨 넣어 방 한쪽으로 밀어낸다.
서울 용산구 동자동. 여기는 김씨의 제2의 고향이다. 그는 경상도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를 잃고 서울에 올라와 안 해본 일이 없다. 한때는 시장에서 푸줏간을 운영할 정도로 잘나가던 시절도 있었지만, 술과 도박에 빠져 가족도 등지고 동자동 쪽방촌을 전전한 지 40여 년이 흘렀다.
절망 속에서도 ‘노력해서 다시 잘 살아보겠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락에 떨어진 삶은 쉽사리 변하지 않았다. 웅덩이에 물 고이듯 가난은 구멍 난 그의 삶에 고이고 또 고였다. 몸이 조금 괜찮을 때는 막노동을 하며 살았지만, 요즘은 건강도 좋지 못하다. 그나마 몸 상태가 괜찮을 때 한나절 폐지를 줍고, 고물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김씨가 사는 쪽방 월세는 23만 원. 매달 월세 내기도 벅차다. 곧 다가올 겨울도 걱정이다. “난방은 주인이 해주는데 마음에 들 만큼 따뜻하게는 안 해 줘.” 너무 추울 땐 주인에게 말해볼 수 있지 않으냐고 묻자 덤덤한 대답이 돌아온다. “없는 사람들은 그런 거 따질 수도 없어. 없으면 없는 대로, 있으면 있는 대로 사는 거지.”
쪽방 주민들 대부분은 기초생활 수급자다. 한 달에 70만 원 정도를 지원받는다. 15만 원에서 27만 원까지 하는 쪽방 월세를 내고 나면 먹고살기도 빠듯하다. 쪽방 주민들은 일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일하면 수급이 끊기니 손에 쥐어지는 돈을 아끼고 또 아끼며 산다. 가톨릭사랑평화의집에서 이틀에 한 번씩 나눠주는 무료 도시락과 주민센터에서 갖다 주는 반찬으로 입치레를 한다. 폐지를 줍느라 돌아다닐 때 빼고는 텔레비전을 벗 삼아 누워 있는다고 했다. “밖에 나가면 다 돈이야. 사람들 만나서 우유 하나라도 사 먹으려면 돈 드는데….”
거리에 어둠이 깔릴 때쯤 복도에 인기척이 났다. 일을 마치고 쪽방 주민들이 하나둘 귀가하는 소리다. 주민들과는 어떠시느냐고 묻자 비참한 대답이 돌아온다. “이 동네 사람들 3일에 한 번씩 죽어 나가요. 나이 드신 분들은 더 하지.” 김씨가 어렵게 말을 잇는다. “없는 사람들은 죽지 못해서 사는 거야.”
어렵게 속내를 드러내서일까 잠시 침묵이 흐른다. 더 머무는 게 실례인듯해 겨울철 건강 조심하라고 말을 건네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김씨는 바닥에 깔린 주름진 이불 속에 손을 넣으며 “그래도 전기장판 있어 따뜻하다”며 애써 웃음 짓는다.
김씨는 여인숙 골목까지 걸어 나와 배웅했다. “아이고, 손님 오셨는데 물 한 잔도 제대로 대접 못 했네.” 어둠침침한 여인숙 쪽방에서 김씨의 하루가 저물고 있다.
백영민 기자 heelen@cpbc.co.kr 이지혜ㆍ전은지ㆍ장현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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