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생활

스스로 영혼의 상처 보듬을 수 있는 영적 힘 길러야

참 빛 사랑 2025. 2. 26. 15:16
 

우리는 살면서 상처받곤 한다. 인간은 사소한 일에도 쉽게 상처를 받는 연약한 영혼을 가진 존재다. 연약한 영혼에 가해진 상처는 치료를 통해 낫는 육체의 상처와는 달리 항상 흔적을 남기며, 영적으로 약해질 때마다 다시금 도져 괴로움과 아픔을 주곤 한다. 이는 우리가 경험의 존재임과 동시에 자기의 고유한 경험과 그 기억을 통해 비로소 자기가 된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는 「고백록」에서 인간의 영혼을 고유한 경험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라 부른다. 그에게 고백은 기억을 떠올림이요, 기억은 자기 자신을 찾는 여정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경험과 기억이 영혼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는 상처로 얼룩져 있다면, 과연 우리는 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앙의 관점에서 이런 상처를 치유하는 힘은 오로지 하느님 사랑에 있다고 주장한다.

마음의 상처는 부정적 경험에서 비롯되며, 그 원인은 실로 다양하다. 그런데 부정적 경험의 무수한 원인 가운데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홀로 서지 못함’이다. 우리는 홀로 서지 못한 채 항상 타인의 인정에 목말라하며, 끊임없이 타인을 욕망한다. 왜 우리는 홀로서지 못하고 타인을 욕망하는 것일까?

플라톤(Platon)은 「향연」에서 타인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을 에로스(eros)의 기원에서 찾는다. 이 기원에 따르면 인간의 성은 본래 남·여 둘만이 아니라 남녀추니(hermaphrodite)를 합해 셋이었으며, 지금의 인간 둘이 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힘과 자만심에 신과 맞섰고, 이를 참지 못한 제우스가 인간을 반으로 잘라놓았다. 그때부터 반으로 잘린 인간은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하며 한 몸이 되기만을 열망했다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구약 성경의 창세기 2장에도 있다. 하느님께서 처음 아담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이 보기 좋지 않아 그의 갈빗대를 빼내어 협력자인 하와를 만드셨다는 이야기다.

하나로 붙어 있다가 둘로 갈라졌든 혹은 애당초 하나였다가 둘로 갈라졌든 두 이야기의 핵심은 타인을 향한 인간의 근원적 욕망과 소외에 관한 것이다. 욕망은 생물학적인 본능적 욕구와 구별되는 인간의 정신적 욕망을 의미한다. 인간은 삶의 여정 내내 자기와 온전히 하나가 될 수 있는 ‘타자인 자기’를 갈망하는 존재다. 인간은 항상 타인으로부터 위로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자 갈망한다. 소외는 자기로부터 근원하지만, 결코 자기가 될 수 없는 ‘자기인 타자’의 낯섦을 의미한다.

나와 타자 사이에 놓인 이런 근원적 소외, 즉 타자의 낯섦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자를 자기와 일치시키려는 욕망이 지나칠 때, 우리는 쉽게 상처받을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잘못된 관계 설정으로부터 얻은 상처는 고스란히 평생 스스로 감당하며 살아야 할 고통의 굴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이는 결코 지울 수 없는 영혼의 부정적 흔적으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혼의 상처를 치유하는 일은 일회적일 수 없으며, 오히려 평생의 과제라 할 수 있다. 부정적인 경험을 가능한 한 최소화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일은 스스로 상처를 보듬을 수 있는 영적 힘을 기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적 치유의 본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