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제12회 신앙체험수기] 특별상 - 치유의 은총에 감사드립니다
참 빛 사랑
2025. 2. 25.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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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6일 서울성모병원 산부인과 진료실.
“어디 봅시다. 피검사 결과 CA125가 5.3, CA19.9도 정상, 골밀도 빼고는 다른 수치들도 거의 정상이네요. CT 결과는 영상을 보면서 전체적으로 설명해 드릴게요. 간도 깨끗하고 췌장도 괜찮고 고관절 부위도 깨끗하고요~” 등등. 난소암 전문 교수님께서 아주 자세히 나의 몸 상태를 설명해 주시며 “축하합니다. 이제는 1년에 한 번씩만 봅시다”라고 말씀하셨고, 항암제 주입을 위해 14년 동안 몸에 부착하고 있던 케모포트도 제거하라며 영상의학과 혈관조영실 예약을 잡아주셨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암투병하며 지낸 15년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갑상선암을 시작으로 난소암ㆍ유방암ㆍ위암, 그리고 두 번의 난소암 재발과 전이로 6번의 암 수술과 27번의 항암치료,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다. 힘들디 힘든 병마와의 싸움. 오로지 성경 말씀에 의지하며 마음관리ㆍ면역관리ㆍ식이관리와 더불어 정기 추적검사를 해왔는데 15년 만에 드디어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이다.
케모포트 제거 시술 후 서울성모병원 1층 로비로 내려와 성모님께 이 기쁨을 알리고 성당에 들어가 잠시 성체조배 후 집으로 돌아왔다.
2009년 2월, 교통사고로 입원하게 되었다. 목을 조금 다쳐 CT와 초음파를 하다가 갑상선 암을 발견했다. 4월에 수술하고 간단히 치료를 마친 뒤 퇴원하자마자 정상출근하며 예전과 다름없이 많은 일들을 해냈다. 당시 내가 가장이기도 했고 아직 딸들이 대학생이었기에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이후 2년 가까이 지나면서 낮에 좀 피곤한 것 외에 별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했는데 새벽녘이면 아랫배가 아파 잠이 깨곤 하면서 배뇨도 쉽지 않았다. 2010년 12월 건강검진 결과 이상이 발견되어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얘길 듣고 서울성모병원으로 갔다. 종합검사 결과 난소암 3기로 판명이 났다.
2011년 1월 19일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가 시작되었다. 힘들긴 했지만 여전히 일은 멈출 수가 없었다. 주변의 걱정 어린 시선을 뒤로한 채 일과 항암치료를 병행하며 6개월이 지났다. 평소 바쁘다는 구실로 주일미사만 의무적으로 했었는데, 항암치료 후에는 가능하면 매일 미사를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다 항암치료 받으면서 신앙생활도 열심히 하는 ‘항암 동기’ 프란치스카도 만났다. 우리는 시간이 날 때마다 서로의 신앙 이야기와 일상적 삶에 대해 담소를 나누었다. 그해 11월, 우리는 성 필립보 생태 마을에 2박 3일간 머물렀다. 공기 맑은 청정지역에서 맛있는 자연식 밥을 먹고 밤엔 의자에 누워 칠흑 같은 밤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똥별을 구경했다. 따끈한 온돌방 아랫목에선 살아온 이야기 보따리를 풀고 울다 웃다를 반복하며 삶의 무게를 덜어냈다. 나의 믿음이 미지근하기는 하나 식지 않는 잔잔한 것이라면 프란치스카는 개신교에서 개종한, 아주 뜨끈하고 성령의 힘이 충만한 믿음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방언으로 기도해줬고 그동안 너무 버거웠다고 눈물 흘리는 나에게 “언니, 언니는 80까지 살 테니까 걱정하지마” 라면서 위로해줬다.
기도를 받은 그날, 잠이 살짝 들었는데 꿈인지 환시인지는 모르겠으나 성모님을 뵈었다. 내가 누워있는 방 천장이 천상갑옷처럼 빛나면서 성모님이 나를 향해 미소 띤 채 쳐다보고 계셨다. 깜짝 놀라 소리를 지르며 잠에서 깼다. 옆에서 자고 있던 프란치스카가 왜 그러냐고 놀라 물었고, 나는 겪은 것을 그녀에게 들려줬다. 그 뒤부터는 힘들거나 죽음이 두려움으로 다가올 때마다 이 체험을 떠올리며 성모님이 나를 지켜주신다는 것을 인지하려고 노력했다.
난소암 표준치료가 끝나고 8개월이 지난 후 PET/CT 검사 결과 종양이 간 표면에 2.5㎝ 정도, 횡격막에 포도송이 열리듯 쫙 뿌려졌고 직장에도 암이 재발, 전이되었다. 교수님은 이번엔 처음보다 많이 심각하고 수술은 외과 교수와 협진으로 이루어질 거라며 수술 날짜를 바로 잡으셨다. 그때 ‘암 치유센터 성모꽃마을’에 가기로 예약돼 있어 교수님께 그곳에 다녀온 후 수술해도 되냐고 여쭈었더니 흔쾌히 허락하시며 거기서 마음을 편히 잘 다스리고 오라고 하셨다. 수술 날짜는 그 다음 주인 2012년 3월 28일로 잡혔다.
성모꽃마을은 청주에 있는 암 환우를 위한 자연치유센터로 박창환 가밀로 신부님이 가꾸신 사랑의 센터다. 그곳에선 암 극복을 위한 5박 6일 동안의 공부와 쉼터를 제공하고 한 달 이상의 장기요양과 호스피스 등 다양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거기서 나는 매일 미사로 시작하는 하루일과를 보내고 여가시간에는 성모님의 칠고 동산을 걸으며 성모칠고 기도와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으려 노력했다. 불안한 마음이 엄습할 때마다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내 생명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악인들이 내 몸을 잡아 삼키려 달려들지라도 내 적이요 원수인 그들은 비틀거리다 쓰러지리라(시편 27,1~)’ 란 문구를 되뇌었다.
일주일 후 수술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10시간에 걸친 대수술 도중 횡격막과 직장에 천공 위험이 생겨 수술실로 보호자 호출도 이루어졌다. 수술 후 정신이 들었을 때는 내 몸에 소변줄과 두 개의 배액 주머니가 달리고 흉관이 삽입돼 있었다. 매일 2리터의 물을 빼내고 통증에 시달리며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했다. 기도를 하려 해도 되지 않았고 말씀을 잡고 마음을 다지려고 시편을 열어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2주의 시간을 보내고 부활절을 맞이했다. 난 링거줄을 주렁주렁 달고 휠체어에 의지한 채 딸들의 도움을 받아 병원 성당으로 가 부활절 미사를 드렸다.
한 달의 입원 후 또다시 항암치료가 시작됐다. 이번에는 처음보다 항암제가 하나 더 늘어 부작용으로 무척 힘이 들었다. 먹을 수도 없었고 음식 냄새만 맡으면 구토하는 등 몸과 마음이 서서히 지쳐갔다. 하루하루 견디기 힘든 날이 계속되면서 이대로는 안 될 것 같아 하던 일을 모두 정리하고 가평 산속에 자리한 암 요양병원으로 옮겼다. 수액을 맞으면서라도 항암치료를 계속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주일날은 병원에서 강촌성당으로 셔틀버스를 운행해 주었다. 베토벤 머리를 한 젊은 신부님은 미사 후, 우리 환우들에게 안수를 해 주셨다. 미사가 끝나고 다 같이 점심을 먹은 후 병실에서 환우 서너 명이 모여 간단히 치유기도와 복음을 읽으며 기도 모임도 했다.
어느 날, 같은 병실 환우가 자기도 성당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십이 조금 넘은 미혼인 그녀는 초등학교 영양사로 근무하던 중 유방암이 간으로 전이되어 수술도 하지 못한 채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받는 중이었다. 나는 항암 치료차 성모병원에 가면서 지하 1층 가톨릭 서점에서 박도식 신부님이 쓰신 「무엇하는 사람들인가」를 구입해 선물로 주었다. 그 친구는 열심히 책을 읽더니만 기도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영세도 받고 싶다고 하여 강촌성당 주일미사 때 신부님께 말씀드렸더니 성탄에 영세식이 있으니 그때 일주일 동안 집중교리를 하여 영세를 주시겠다며 기본 기도문을 모두 외우라고 하셨다. 성탄이 가까워졌으나 산 속에서 강촌성당까지 갈 방법이 없어 막막했는데 마침 차가 있는 형제님이 태워다주셔서 무사히 일주일 교리를 마쳤다. 그 환우는 비앙카라는 세례명으로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난 대모를 하게 되었다.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망설이던 나에게 언니보다 오래 살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대모를 서달라고 해 웃으면서 대모 대녀 관계가 되었는데 그녀는 2년 뒤 하늘나라로 가 버렸다.
2012년 9월 말께 우여곡절 끝에 15번째의 항암치료가 끝나고 PET/CT를 찍었다. 교수님은 간 주변에 작은 혹들이 보이는데 단순 흔적일 수도 있다며 항암치료는 이제 그만할 테니 면역력으로 이겨내라 하셨다. 다만 오른쪽 유방에 종양 같은 것이 보이니 유방암 센터에 가보라며 진료 의뢰를 해 주셨다. MRI 촬영 및 조직검사를 실시했다. 유방암 센터 교수님은 종양 모양은 안 좋으나 조직검사 결과는 양성이라 하셨다. 3개월 뒤 추적관찰 결과 종양 부위가 넓게 펴져서 정확한 조직검사를 위해 수술을 받아야했다.
2013년 1월 16일, 4번째의 암 수술을 했다. 난소암 수술에 비해 정말 간단했지만 심리적으론 몹시 힘들었다. 왜 하느님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는 걸까? 갑상선암ㆍ난소암, 이번에는 유방암. 아무리 마음을 다스리려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열심히 기도에 집중하려 해도 어느샌가 마음은 불안한 미지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었다. 조직검사 결과 병기는 다행히 1기지만 암세포 분화도가 높아 33번의 방사선을 쫴야 했다. 방사선 치료는 일주일에 4회씩 실시됐다. 난소암 항암치료보다는 한결 수월했다.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서 자꾸만 불안해지는 마음을 안정시키려고 성모병원 별관 ‘영성과 건강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명상프로그램을 신청했다. 교수 수녀님은 나의 암 히스토리와 현재 심리상태를 들으시고 "이번에 ‘내 영혼 돌보기 프로그램’이 5주간 진행된다"면서 프로그램 CD와 「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 「호스피스 사랑의 노래」란 책을 건네시면서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수녀님이 주시는 과제를 수행하고 1주일에 한 번씩 수녀님과의 면담이 이루어지면서 순간순간 마음의 안정을 찾기도 했지만 얼마 안 가 재발의 두려움 속에 빠지곤 했다. 또 어떤 암이 어디로 튈지 너무도 불안했다. 무엇이든지 붙잡고 나를 지탱하며 희망을 놓지 않아야 했다. 그래서 방사선 치료 후에는 1층 성당으로 가 감실의 예수님과 잠시 이야기도 하고, 지하 서점에서 문고판 책인 「안셀름 그륀의 치유」, 「성경 말씀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 극복하기. 스트레스」, 「세상에 하나뿐인 나 사랑하기」 등을 구입해 읽고 또 읽었다.
그해 성탄까지는 매일 소나무 숲 둘레길을 걸으며 마음관리ㆍ음식관리를 하는 등 조금은 편해진 일상을 지내다가 12월 24일날 공단에서 실시하는 건강 검진을 했는데 위 내시경 결과 3.5cm 정도의 혹이 발견됐다. 소견서를 들고 또 성모병원 소화기내과를 찾았다. 내시경 초음파와 CT 촬영결과 모양이 안 좋은 종양이 있어 위장관외과로 보내졌고, 또 수술대에 눕게 되었다. 이번에도 수술 도중 보호자 호출이 있었다. 종양이 위와 림프로 퍼져 위의 3분의 2와 림프를 제거했다. 물 한 모금도 겨우 넘기면서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희망의 흰 구름은 간데 없고 왜 자꾸 먹구름만 드리우는지. 내 마음엔 평화가 없었다. 그래도 ‘평화를 주옵소서. 어떠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내안에 평화가 머물게 하소서‘ 기도했다. 그러면서 시편 (38,22-23) ’주님, 저를 버리지 마소서. 저의 하느님, 저를 멀리하지 마소서. 주님. 제 구원의 힘이시며, 저를 도우소서‘ 울부짖었다.
겨우 죽을 먹어가며 치료의 여정을 계속했다. 음식만 들어가면 위통으로 뒹굴고, 항암제 부작용으로 구내염도 생겨 잇몸에서는 피가 나는 등 고통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했다. 체중은 41kg까지 줄었다. 그래도 교수님은 영양제 링거를 투여하며 항암치료를 지속했고 난 희망과 용기를 얻기 위해 요나의 뱃속의 기적을 떠올리며 하루하루를 지냈다. 그러다 다시 위내시경을 하게 됐는데 이번에는 위 상부 식도 부분에 0.7cm의 혹이 보여 위 절제 후 12번의 항암치료를 받고 또 한 번의 위 수술이 이루어졌다.
이제는 마약성 진통제도 패치도 통증을 달래주지 못했다. 음식만 먹으면 통증에 시달리다 보니 트라우마까지 생겼다. 음식만 봐도 위통을 느끼는 것이다. 뼈만 앙상한 채 누워있는 내게 성당 자매들이 병문안을 왔다 갔다. 현관에서 남편과 호스피스 병동에 가는 것이 어떻겠냐고 주고받는 말이 내 귀에 들렸다. 호스피스⋯. 벌떡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려야겠다. 이대로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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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을 졸라 차 뒷자리에 누워 마지막으로 꼭 받고 싶었던 치료를 위해 대전대학교 한방병원 종양내과에 갔다. 교수님께 그동안의 암 히스토리와 진단서, 소견서 등을 제출하고 거금의 약값을 지불한 뒤 약을 가져왔다.
그리고 하느님과 최후의 딜을 했다. 언젠가는 꼭 하려고 했던 신·구약 73권 필사를 마칠 수 있도록 3년만 더 살게 해 달라고 기도를 드렸다. 간단한 짐을 준비해 포천의 산속 암 요양병원에 입원했다. 영양수액을 맞으며 조금이라도 뭘 먹으려고 노력했고 지팡이를 짚고 매일 산속을 걸었다. 피톤치드를 마시며 문고판 성경을 읽고 병실에 돌아와선 필사를 했다. 항암 후유증으로 오른쪽 어깨 회전근개막이 파열되고 손가락 감각이 없어져 힘들긴 했지만 하루 1시간 30분 정도 필사를 하면 3년 안에 끝낼 수 있을 것 같아 매일 루틴으로 했다.
그렇게 위암 치료를 끝낸 2015년 2월, 유방암 정기검진 결과 또 문제가 생겼다. 유방암 교수님은 CEA 종양 수치가 높게 나왔다며 위 수술을 해주신 위장관외과 교수님께 의뢰해 주셨다. 그 수치는 대장암 표지자 수치여서 대장내시경과 피검사를 다시 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일주일 동안 극도의 불안과 걱정으로 잠이 안 와 수면제에 의지해 겨우 조금씩 자곤 했는데 새벽녘에 꿈을 꾸었다.
어디인지는 모르겠으나 넓은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울기도 하고 웅성거리는데 나도 그 가운데서 평소 나를 위해 기도를 열심히 해주는 언니와 함께 서럽게 울었다. 그러는 중 신부님 여러 분이 미사를 드렸다. 그 전에 우리 본당에 계셨던 장대익 루도비꼬(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다.) 신부님도 거기에 계셨다. 미사가 끝나고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어디로 간다며 비행기를 타기 위해 줄 서 있었는데 루도비꼬 신부님이 “데레사는 이쪽이야”라며 다른 줄에 서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줄을 바꿔 서서 기다리다 잠이 깼다. 기분이 묘했다.
일주일 후 대장내시경 결과를 듣기 위해 위장관 교수님께 갔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성당으로 가 감실에 계신 예수님께 ‘어떤 상황이든 받아들이게 해주세요‘ 라고 기도드린 후 진료실로 들어갔다. 교수님은 종양 수치가 조금 높기는 하나 대장내시경 결과는 용종 2개만 뗐다며 안심해도 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표준치료가 끝났다. 요양병원으로 돌아가 하루하루 지내면서 레지오도 다시 시작했다. 매주 금요일 병원 셔틀버스를 타고 서울 태릉역까지 오면 큰딸이 나를 픽업해 성당으로 데려다 주어, 조금 늦기는 했지만 회합시간에 함께 기도할 수 있었고 회합이 끝나면 집에서 잠시 쉬다가 저녁 6시에 당고개역에서 셔틀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돌아왔다.
조금씩 컨디션이 회복되면서 프란치스카에게 기도 모임을 만들자고 했다. 프란치스카도 난소암이 두 번 재발되어 나와 같은 요양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기에 일단 내 병실에서 둘이 기도를 시작했다. 저녁 식사 후 산책을 다녀와서 7시부터 삼종기도, 치유기도, 매일 미사에 나와 있는 독서와 복음, 그리고 묵주기도를 바쳤다. 그렇게 하다 보니 기도 식구들이 한두 명씩 늘었다. 이제 좁은 병실에서는 기도 모임이 어려워 병원 원장님께 낮에 명상의 룸을 사용할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드렸더니 흔쾌히 승낙하셨다. 프란치스카와 나는 천주교 환우들을 만나면 기도 모임에 함께 하자고 권유했다. 그리고 주일엔 병원서 가까운 내촌성당으로 미사를 다녔다. 영세받은 후 오랫동안 냉담했던 환우가 주의 기도ㆍ성모송부터 다시 배워가며 기도 모임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신앙에 의지하며 투병생활을 하는 것을 보고, 기도 모임을 시작한 것이 얼마나 서로에게 희망이 되는지 감사할 따름이었다. 기도 모임이 점점 활성화되면서 우리는 병원에서 멀지 않은 성지를 찾아 2~3개월에 한 번씩 성지순례도 다녀왔다. 풍수원 성당ㆍ마제성지ㆍ천진암 성지 등을 찾아 미사 드리고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성지 둘레길도 산책하다 맛있는 점심을 먹고 돌아오곤 했다.
3년의 성경 필사 약속 중 어느덧 2년이 지나자 구약성경을 거의 마무리하게 되었다. 욕심이 생긴 나는 어느 순간부터 지향을 ‘신구약 다 쓸 때까지 3년만 더 살게 해주세요‘가 아닌 ‘3년 동안 다 쓰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치유의 은총을 주세요’라고 바꿔서 기도하고 있었다. 2017년 8월 17일, 드디어 3년의 긴 필사 여정을 끝내게 되었다. 어느새 내 앞엔 다 쓴 두툼한 성경 쓰기 대학노트 13권이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항암 부작용으로 약지와 새끼 손가락이 마비돼 한참을 주물러 손을 풀고 써 내려간 노트들이었다. 미션을 수행했다는 뿌듯함과 성경을 쓰면서 말씀으로 위로받고 치유받은 그 여정에 함께 할 수 있었던 데 대해 ‘주님, 감사합니다. 이제는 내 집으로 돌아가 완치의 여정을 향해 열심히 달려가겠습니다’ 라고 감사기도 드리며 병원 생활을 정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주님과 또 약속했다. 이제는 집에 왔으니 2년 동안 매일 미사를 드리며 열심히 치유의 길을 걷겠다고. 월요일에는 6시 새벽 미사, 그 외에는 집 근처 주변 성당의 10시 미사를 드리며 하루일과를 시작했다. 주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집을 잠시 떠나는 일이 있어도 어떻게든 그곳 성당의 미사 시간에 맞춰 미사를 드렸다. 그리고 집 가까이 있는 무연고 영유아 장애 사회복지시설을 찾아가 일주일에 한 번씩 자원봉사도 시작했다. 이곳을 청소하고 소독하며 아이들의 식사를 도왔다. 체력적으로 힘들고 지치기도 했지만 아기를 품에 안고 젖병으로 우유를 먹이며, 이렇게 살아서 작은 봉사를 할 수 있다는 것에 감사를 드렸다.
재발의 두려움과 불안이 엄습해 올 때에는 집에서 멀지 않은 우이동 예수고난회 명상의 집을 향해 걸으면서 묵주기도와 십자가의 길을 바쳤다. 예수님의 수난을 묵상하며 나의 고통과 불안을 덜어내려고 했다.
암 치료와 몸 관리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점점 좋아지는 성적표를 받았다. 갑상선암을 시작으로 유방암ㆍ위암은 10년이 지나 완치 판정을 받았고, 두 번의 재발과 전이로 날 괴롭혔던 난소암은 중간중간 종양 수치가 정상범위에서 조금씩 이탈하기도 했지만, 흔들리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고 관리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주님 또 하루를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를 시작으로 아침기도와 미사, 면역요법ㆍ 식이요법ㆍ운동요법을 하며 규칙적인 일상을 지낸 결과 드디어 난소암도 좋은 성적표를 받아냈다.
네 종류의 암에서 해방된 2024년 마지막 달, 2011년 난소암 판정을 받은 이후 써온 병상 일기를 펼쳐 보았다. 암 통증으로 고통 속에서 헤매는 날도 많았지만 또 바쁘게만 지냈던 나를 되돌아보는 계기도 되었고 고통 중에서도 주님의 손을 놓지 않으려고 말씀을 꼭 붙잡고 지내온 날들이었다.
며칠 있으면 성탄이다. 암에서 해방돼 일흔이 넘은 나이에 새롭게 태어남을 감사드리며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맞이해야겠다.
최남옥(데레사) / 서울대교구 수유1동본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