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신앙 나의 기업] (15) 강석찬 하상 바오로 (주)화성한과 대표
“친환경 한과 생산, 생태와 생명을 살리는 길이죠”
농대를 졸업한 서울 출신의 젊은이가 농촌에 정착했다. 미래가 막막하다고 본 아내는 부업으로 한과를 시작했다. 거듭되는 시행착오 끝에 부업은 본업처럼 돼버렸고, 남편도 농사일을 접고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친환경 우리농으로 전통 한과를 생산하는 강석찬(하상 바오로, 59) 화성한과 대표 이야기다.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초록로에 있는 화성한과 입구 왼쪽에는 ‘소통’이라고 쓰인 작은 바위가 있다. 몇 년 전 직원들이 ‘소통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며 바위를 구해 써놓은 표석이다. 직원들이 표석을 갖다놓았을 때 “(내가 그렇게도 소통을 못 하나 싶어) 가슴이 뜨끔했다”는 강석찬 대표. 그러나 프란치스코 교황의 생태 회칙 「찬미받으소서 발표 이후 많이 회자되고 있는 ‘생태’라는 용어를 빌리자면, 이 대표는 생태에 있어서 소통의 달인이다. 그는 ‘친환경’이야말로 생태를 살리는, 생명을 살리는 바른길이라고 믿고 또 그렇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농대를 졸업하고 수원가톨릭농민회 사무국을 통해서 농촌에 정착한 강 대표는 간호대를 졸업한 후 역시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무의촌 의료 활동을 하던 아내(송희자, 인덕 마리아, 58)를 만나 결혼했다. 30년 전인 1985년이었다. 부부는 화성시 매송면 야목리에 농사꾼으로 정착했다. 마을 사람들 눈에는 젊은 부부가 농촌 생활을 하는 것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농사일을 하는 어설픈 모습이 안쓰러웠다.
아내 송씨는 답답했다. 젊음의 패기로 농군이 되었지만, 미래가 없어 보였다. 부업으로 미숫가루, 된장, 고추장, 전통 한과인 강정과 유과도 만들었다. 그러면서 부부는 두 가지를 떠올렸다. 농사를 지어도 소비가 따라주지 않으면 소용이 없으니 생산한 쌀을 소비하게 하려면 가공식품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게 하나였고, 우리 농촌을 살리려면 농약을 치는 대신 친환경 유기농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 게다가 강 대표는 당시 농약을 치다가 중독돼 일주일 동안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후 강 대표는 친환경 농법만으로 농사를 지었고 아내는 한과를 만들면서 재료를 친환경 우리 농산품으로만 사용했다. 이런 소문이 알려지면서 ‘한살림’과 연결됐고, 송씨가 만든 한과는 한살림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판매됐다. 1994년 정부의 전통식품 자금 지원업체로 선정되면서 ‘화성한과’라는 이름으로 정식 개업했다. 개업 이후에도 우리 고유의 맛과 방식을 살리고자 시행착오를 거듭했다. 전국의 유명 한과 제조업체를 찾아다녔고 궁중음식연구원에서 수강하고 대학 식품영양학과도 다시 다녔다. 수원 시내 뻥튀기 아저씨에게서도 비법을 배웠다.
이렇게 해서 20여 년이 지난 지금 화성한과는 유과 강정 약과 같은 전통 과자류와 떡, 조총과 엿 등 약 50종의 전통 가공식품을 생산하고 있다. 화성한과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은 한살림과 우리농 등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제공된다. 제품은 화성한과라는 회사 이름으로만 아니라 ‘송희자 한과’라는 이름으로도 판매된다.
화성한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원재료가 국산임은 물론이고 친환경 유기농법으로 생산한 것들이다. 또 하청을 일절 주지 않는다. 하청을 줄 경우 관리의 투명성 확보가 문제될 수 있어서다. 엄격한 위생 관리와 품질 관리를 통해 식품을 생산할 뿐 아니라 포장까지도 자체로 해결한다. 투명성 확보라는 같은 이유에서다.
화성한과 제품은 일반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다. 전량 한살림과 우리농 등을 통해 주문 생산하기 때문이다. 한때는 농협 하나로에 매장을 열기도 했지만 곧 철수하고 말았다. 경쟁력에서 따라갈 수가 없어서다.
가공식품을 만드는 화성한과가 원재료에서까지 줄기차게 친환경 유기농 우리 농산물을 고집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게 바로 생명을 살리는 길이고 건강한 삶을 사는 길이기 때문이다. 대형마트를 포기하고 생활협동조합을 통해 주문생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화성한과의 직원은 평상시에는 70명 정도다. 한과 가공업계에서는 대단히 큰 규모다. 하청을 전혀 주지 않고 제품 포장까지 일체의 공정을 자체로 해결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추석과 설 등 명절을 앞두고는 50명 이상 늘어난다.
강 대표 부부가 직원들에게 늘 강조하는 말이 있다. ‘싸우면 화해를 하고 화해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음식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엄마가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다는 것은 음식을 만드는 엄마의 손맛에 엄마의 마음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음식에도 기가 들어간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직원들에게는 반 우스갯소리지만, 싸우고 나서 저녁까지 화해하지 않으면 다음날 출근하지 말라고 그래요.”
젊은 시절 가톨릭농민회를 통해 활동하기는 했지만 강 대표는 무신론자였다. 아내인 송씨는 개신교 신자였다가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때에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관면 혼배를 하고 주일이면 아내를 성당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지냈지만 여전히 신자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일이 계기가 됐다. 1994년 화성한과를 개업하기 이틀 전 공장에 불이 나 다 타버렸다. 보험으로 공장은 다시 지을 수 있었지만, 아내는 서럽게 울었다. 발바닥 신자처럼 주일만 지킨 탓도 있었지만 어려운 일을 당했는데 찾아와서 위로해주고 함께 기도해주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아내의 눈물은 그것 때문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고 나니 자신도 평소에 어려운 일을 당한 이웃에게 그렇게 무관심했던 게 아닌가 하는 자책의 눈물이었습니다. 내가 성당에 나가면 울음을 그치겠느냐고 했더니 그러겠다고 하더군요.”
농민회 활동 등을 통해 여러 신부님과 만나면서 ‘제일 큰 죄는 사랑을 실천하지 않은 죄’라는 말과 지난해 세상을 떠난 예수회 정일우 신부가 평소에 즐겨 하던 ‘함께 있어주는 것밖에는 없다’는 말, 이런 것들을 신앙의 기본으로 여기고 살고 있다는 강 대표는 앞으로의 계획과 관련, 이렇게 말한다.
“화성한과는 한살림이라는 소비자와 생산자의 연계 속에 출발했습니다. 주식회사라고 하지만 아직 개인 기업인 회사를 사회적 법인으로 내놓는 문제를 조심스럽게 고민하고 있습니다. 자식들에겐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을 아예 지우라고 이미 여러 번 말했고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