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기업

[나의 신앙 나의 기업](5) 최상준 다니엘 (주)남화토건 대표이사

참 빛 사랑 2016. 9. 26. 10:13

하느님 보시기에 좋은, 성실과 정도 경영으로



▲ 지난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을때 현지로 달려간 최상준 회장이 유가족돌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남화토건 제공




성실과 정도(正道)와 공존을 핵심 가치로 삼아 69년을 걸어온 기업이 있다. 광주ㆍ전남 지역의 대표적 향토 기업 가운데 하나인 (주)남화토건이다. 남화토건은 2012년 지역 건설업계에서는 처음으로 코스닥에 상장했다. 또 석탑, 동탑, 은탑에 이어 2013년에는 금탑까지 4개 부문의 산업훈장을 석권한 회사이기도 하다. 이 역시 지역에서는 처음이었다.

남화토건은 차입금이 없다. 빌린 돈이 없다는 것인데 그만큼 재무구조가 탄탄하다는 것이다. 남화토건은 또 어음을 발행하지 않는다. 어음 발행은 하도급 업체를 둔 기업들에서는 거의 일반화돼 있지만, 이 회사는 매달 협력 하도급 업체에 공사 대금을 전액 현금으로 지급한다. 이런 일은 재무 구조만 탄탄하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함께하는 마음, 배려하는 마음과 의지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이 회사를 이끌고 있는 이는 최상준(다니엘, 77, 광주 광천동본당) 부회장. 키도 덩치도 모두 작지만, 연세보다 훨씬 젊어 보이게 하는 동안에 해맑은 미소, 그리고 만나는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소탈함이 인상적이다. 그는 22년 전부터 대표이사를 맡아 회사를 지역의 대표적 건설회사로 키워온 주역이다. 최 부회장은 대학을 졸업하던 1964년에 남화토건에 입사해 만 51년을 남화토건과 더불어 살아온 말 그대로 ‘남화인’이다.

하지만 최 부회장이 남화토건과 맺은 인연은 이보다 훨씬 오래전부터다. 남화토건은 최상준 부회장의 11살 위 친형인 최상옥(베드로, 88) 회장이 20살 때에 세운 회사다. 그는 14살 때 일본인 목수(도편수) 밑에서 건설일을 배웠고, 해방되고 일본인이 떠나가자 이듬해인 1946년 남화토건을 세웠다. 6·25전쟁이 끝나고 복구 사업이 진행되면서 회사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최상준 부회장은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형님 잔심부름을 하면서 건설 건축 분야를 귀동냥했다. 대학 전공을 건축공학과로 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고, 대학을 졸업하면서 바로 남화토건에 입사했다. 상무ㆍ전무ㆍ부사장을 거쳐 30년째 되던 1993년 대표이사 사장이 됐고, 다시 10년 후인 2003년부터는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회사를 운영해오고 있다. 회장은 아직 형님이다. 남화토건은 11살 터울인 두 형제가 평생을 바쳐 가꿔온 기업인 셈이다. 어느 기자는 ‘형이 길을 닦아 놓았고 동생은 능숙하게 운전을 해왔다’는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주위에 알려져 있는 최상준 부회장은 요행을 바라지 않는다. 형의 회사에 입사했지만 최고 경영자가 되기까지 30년이 걸렸다. 그의 성실함은 지금도 그대로다. 아침 7시면 꼼꼼하게 업무를 챙긴다. 꼼꼼함은 깐깐함과 연결되기가 십상이지만 최 회장은 그렇지 않다. 소탈한 성품 그대로 격의가 없다. 그의 꼼꼼함은 기본을 중시하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작은 것이라도 기본을 잘 갖추고 있으면 성장할 수 있다고 그는 믿는다. 성실하지 않으면 기본을 갖출 수 없다.

기업을 경영하면서 정도(正道)를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최상준 부회장은 정도 경영, 투명 경영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해 왔다. 그래선지 남화토건은 지역 업계에서는 불법, 편법의 축재나 투기, 탈세가 없는 기업으로 정평이 나 있다고 한다. 정도는 또한 정도(程度), 곧 알맞은 한도 또는 분수와 연결된다. 분수에 넘치는 일을 추구하면 정도를 벗어나기에 쉽다.

정도를 지키면서 발전하려면 외적인 추구가 아니라 부단한 자기 혁신, 내적 쇄신이 필요하다. 최 부회장은 철저한 품질 경영과 기술 혁신으로 회사 발전을 이끌었다. 1998년부터 국제표준인 ISO9001 품질시스템 인증을 받았고, 2005년에는 한국표준협회(KSA) 9001 품질경영시스템 인증을 받았다. 대한주택공사, 한국농어촌공사, 주한미군으로부터 품질관리 우수업체로 선정됐고, 산학협동을 통한 기술 혁신으로 특히 항만 건설 분야에서 역량을 인정받았다. 각종 산업훈장을 비롯해 2013년 자랑스러운 전남인상, 2014년에는 경영자 대상을 수상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로서 직원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사회 속의 기업으로서 사회와 더불어 살아가는 일 또한 최 회장의 삶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최 부회장은 1990년대 후반 IMF 경제위기를 구조 조정이나 단 사람의 사퇴 권유도 없이 넘겼다.

“당시 회사에 일거리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직원을 내보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지만 같이 살아보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직원 교육이었습니다. 기술 교육, 품질 관리 교육 등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육으로 6~9개월을 지냈습니다. 돌이켜보면 이것이 ‘남화’의 저력이 됐습니다. 이 교육을 바탕으로 남화토건은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직원들을 위해 자녀 학자금 지원, 해외 연수, 건강 진흥 등 다양한 복지 제도로 공존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최 회장의 지역 사회 공헌은 더 빼놓을 수 없다. 자신의 호를 딴 석봉 장학재단을 통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것을 비롯해 결식학생 후원, 심장재단 후원, 지역 학교 발전기금, 교회 발전 기금 및 각종 후원금으로, 지금까지 최 부회장이 지역 사회와 교회에 개인 재산을 털어 기부한 성금은 100억 원이 넘는다. 지난해에는 자비 26억 원을 들여 지역 주민의 숙원인 공공 도서관을 건립하기도 했다. 2008년 만 70세가 될 때까지 98회나 헌혈에 참여하기도 했다. 빛고을 결식학생 후원재단 이사장, 적십자사 광주ㆍ전남 지사 회장 등 그가 현직으로 맡고 있는 직함만 10여 개에 이른다.

하지만 최 부회장은 개인적으로는 사치하지 않는다. 소탈한 만큼이나 검소하다. 생활에 불편하지 않은 만큼을 제외하고는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좋다는 최 회장. 그래서 그는 “기업을 경영해 오면서 가장 기뻤던 일은 금탑산업훈장을 받은 것이지만,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남화토건을 코스닥에 상장한 일”이라고 말한다.

최 부회장은 1985년 자신보다 5년 앞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아내(이승진, 체칠리아)의 권유로 광주 호남동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무리 불량한 사람이라 해도 신자가 비신자보다 훨씬 낫다”고 말하는 그는 틈나는 대로 묵주기도를 즐겨 바친다. 레지오 마리애 쁘레시디움 단장을 시작으로 본당의 여러 직책을 맡아 활동했고 교구 경제인회 회장으로도 오래 봉사한 최 부회장은 현재 광주평화방송 이사로서 물심양면으로 교회 일을 돕고 있다.

글·사진=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