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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출신 정치 이론가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이란 말을 남겼다. 악이 특별히 악한 동기나 사악함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 일상적인 무사유(사고의 결여)와 책임 회피에서 발생한다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으로 일반화할 순 없지만, 생각하지 않음으로 인해 발생하는 범죄나 악한 일이 우리 주위에 비일비재한 것도 사실이다.
종교가 사유와 멀어질 때 사회에 큰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존재로 전락한다. 그러한 종교가 정치와 결탁할 경우 종교는 선동의 도구로, 정치의 노리개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우리는 이를 전 세계적으로, 특히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목격하고 있다.
천주교 신자들은 종종 ‘비지성적’이란 비판을 받는다. 성당은 열심히 다니지만, 막상 성경이나 교리에 대한 물음에는 잘 모른다고 답하는 경우가 많다. 대체로 가정이나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신앙과 동떨어진 것으로 생각한다. ‘신앙 따로 삶 따로’도 문제이지만, 신앙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신앙으로 세상일을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이러한 비지성적 신앙은 언제든 정치적 선동에 휩쓸리고 그릇된 신심이나 유사종교의 유혹에 빠지기 십상이다.
어떤 신자들은 교회가 왜 정치에 관여하고 사회적 사안에 관심을 갖느냐고 항의하기도 한다.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주교님·신부님들 때문에 수십 년 된 신앙생활을 접고 이제 성당에 안 나가겠다고 선언하는 신자도 있다.
지금 한국 사회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에 처해 있다. 이럴 때일수록 정신을 가다듬고 사회 안에서 돌아가는 일들에 대해 이성적으로, 특히 교회와 신앙의 입장에서 냉철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
교회는 신앙에서 이성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신앙과 이성이 “진리를 바라보려고 날아오르는 두 날개와 같다”고 하였다.(회칙 「신앙과 이성」 1항) 신앙 없는 이성은 사유의 최고 경지까지 이를 수 없고, 이성 없는 신앙은 맹목이나 신화에 빠질 위험이 있다. 신앙과 이성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발전할 때 인류에 큰 유익을 선사한다.
물론 신자 개개인이 세상 모든 문제를 신앙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교회가 공식적으로 취하는 입장에 귀를 기울이며 자기 것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교회는 각 분야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세상과 교회가 고민하는 현 시대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신학적으로 숙고하고, 이에 대한 공식 입장을 표명한다. 물론 교회가 신자들에게 획일적인 생각을 강요할 순 없지만, 세상의 여러 오류를 지적하고 교회 가르침에 따라 진리를 향한 방향을 제시함으로써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사유를 넓히고, 세상과 대화하며 보다 인간적이고 정의로우며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동참하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비상계엄 선포와 해제, 대통령 탄핵과 관련한 최근의 정치적 이슈에 대해 주교회의는 교회의 공식 입장을 분명히 천명하였다. 물론 이것이 믿을 교리는 아니지만, 성경과 성전에 근거한 것이기에 신자들은 그 안에 담긴 교회 정신을 이해하고, 혹시라도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인간의 이성은 약하고 이해관계에 얽히기 쉽다. 신앙이 한국인의 무뎌진 이성에 도움을 줄 때다. 정치적으로 혼란을 겪는 이 시기에, 우리는 신앙을 통해 여러 이해관계와 이념에서 벗어나 무엇보다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실현될 수 있는 길을 찾으며, 이 땅에 구원의 진리가 실현되도록, 거짓과 폭력이 사라지고 정의와 평화가 이 땅에 도래하도록 기도해야 할 것이다.
한민택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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