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부턴가 우리도 모르게 지니게 된 폐쇄성과 초양극화는 굳게 닫힌 아파트 문화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지. 사진은 발코니가 빼곡히 들어찬 미국의 한 아파트 모습. OSV
그러길래 이웃은 사촌이라 하지요
멀리 있는 친척도 사촌만은 못해요
그 누구가 뭐래도 이 마음은 언제나
내 이웃의 슬픔을 내가 대신하지요
19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 옥희의 ‘이웃사촌’이다. 대중가요는 그 시대의 거울이며 초상이라고 한다. 사실 그때는 그랬다. 허름한 단독주택이 대세였던 그때는 이웃과 자주 만나 함께 어울렸다. 옆집, 앞집, 심지어 뒷집의 아저씨, 아주머니, 그리고 오빠, 언니, 친구들 얼굴까지 지금도 기억이 날 정도다. 하지만 지금은 ‘이웃사촌’이란 말이 옛말이 됐다.
물리적으로 가까울수록 더 친해지면서 호감을 느끼는 심리적인 현상을 ‘근접성 효과’라고 한다. 그러니깐 멀리 사는 친척보다 가까이서 자주 만나고 이야기하다 보면 이웃이 더 친밀해지면서 ‘사촌’이란 근접성 효과가 나타난다. 그런데 이 또한 심리적 이론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이웃과 물리적으로 무척 가까이 살고 있다. 10명 중 8명이 아파트와 다세대주택, 연립주택을 포함한 공동주택에서 살고 있다고 하니 말이다. 그러니 분명 ‘근접성 효과’로 이웃사촌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정서적, 심리적 거리는 꽤나 멀다. 모든 서비스 시설을 공동으로 관리하고 공유하는 아파트지만 동시에 철저하게 폐쇄되어 있다. 아파트 속 가구는 숫자로 구별되고 철저하게 서로를 소외시키는 굳게 닫힌 구조다. 게다가 아파트는 더 이상 주거공간인 ‘집’이라고 부를 수 없는 그 어떤 것이 된 지 꽤나 오래다.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는 상징적인 기호이며 성공에 따른 신분이고, 계급의 지표다. 또한 경제적 부를 이뤄내기 위한 투기의 대상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구별되기도 하고 차별하기도 한다.
“언제나 평등하지 않은 세상을 꿈꾸는 당신에게 바칩니다.” 최근 논란을 일으킨 어느 고급 신축 아파트의 광고 문구다. 한때 이 문구로 인해 온라인 접속이 폭주했다고 한다. “천박한 자본주의”, “부자들의 우월성 노골적으로 표현”, “대놓고 불평등 찬양”, “현실은 드라마보다 심하다”라는 비난 등으로 급기야 광고문구가 삭제되고 사과문까지 올라왔다. 특권층만 입주하는 아파트의 이 마케팅 문구는 초양극화 사회 속 우리의 자화상이며 불평등을 꿈꾸는 현대인들의 욕망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고 할 수 있겠다.
박완서(정혜 엘리사벳) 작가의 소설 「옥상의 민들레꽃」에서 서울의 비싼 땅에 빌딩처럼 우뚝 선 최고급 아파트를 연상케 하는 ‘궁전아파트’가 등장한다. 이곳에서 어느 날 자살소동이 일어난다. 할머니들이 연이어 아파트 베란다에서 뛰어내려 자살을 시도한 것이다. 이때 아파트 사람들의 가장 큰 두려움은 아파트값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런저런 예방책을 내놓는다. 이때 작가는 어린아이의 시선으로 말한다. 할머니에게 필요한 것은 풍요로운 물질이 아니라 가족들의 사랑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그리고 자살을 예방할 수 있는 것은 아파트 사람들이 말하는 ‘쇠창살’이나 ‘자물쇠’가 아닌 바로 민들레꽃이라는 의미 있는 말을 남긴다.
땅과는 점점 멀어지는 초고층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 줌의 흙에서도 꽃을 피우는 민들레꽃은 할 말이 참 많을 것 같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구별하고 차별하며 불평등을 꿈꾸는 아파트공화국 사람들에게 작은 틈만 있으면 뿌리를 내리고 꽃대가 꺾이거나 밟혀도 고개 들며 살아가는 민들레꽃은 참으로 거대한 스승이 아닐까 싶다.
영성이 묻는 안부
건축가 루이스 칸(Louis Isadore Kahn)은 “하나의 건물을 만든다는 것은 하나의 인생을 만들어 내는 것”이며 “방은 건축의 기원이며 마음의 장소”라고 말해요. 거주공간이 단순히 장소가 아닌 인생을 만들고 마음의 장소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는 주거공간이 곧 내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고 할 수 있겠죠. 환경심리학자들도 주거환경이나 장소가 곧 우리 인격형성에 큰 영향을 준다고 하니까요. 그러니 우리는 어떤 주거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둘러보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인 것 같습니다. 혹시나 너무 가까워서 불편해지는 이웃일까요? 편리해서 소통이 단절되어가는 가족일까요? 물리적인 거리만큼이나 정서적인 거리도 가까운 ‘이웃사촌’이 그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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