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가 돌봐줬다고 하는 여관을 기념해 6세기쯤에 세워진 수도원과 성당터. 예루살렘에서 예리코 쪽으로 18㎞쯤 떨어진 도로 한쪽에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박물관 겸 순례객들을 위한 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옛 수도원 자리의 물저장고.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루카복음의 이 대목은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는 율법 교사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10, 25-28), 그 답변과 관련한 구체적인 비유(10,29-37)로 이뤄져 있습니다.
가장 큰 계명(10,25-28)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서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지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스승님”이라고 부르지만 묻는 저의가 따로 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묻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즉각적인 답을 내놓지 않으시고, 거꾸로 율법교사에게 질문하십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10,25-26)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관한 부분은 구약 신명기 6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이고, 이웃 사랑에 관한 부분은 레위기 19장 18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는 율법교사답게 정답을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고 말씀하십니다.(10,27-28)
▲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사람을 데려가 돌봐줬다고 하는 여관을 기념해 6세기쯤에 세워진 수도원과 성당터. 예루살렘에서 예리코 쪽으로 18㎞쯤 떨어진 도로 한쪽에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 박물관 겸 순례객들을 위한 예배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왼쪽). 오른쪽은 옛 수도원 자리의 물저장고. 가톨릭평화방송여행사 제공 |
여기까지가 말하자면 1라운드입니다. 권투 용어를 빌리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떠보려고 ‘잽’을 날렸으나 주먹은 허공을 가르고 맙니다. 오히려 예수님에게 정통으로 ‘어퍼컷’을 얻어맞고는 자백합니다. 자백한 내용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다시 ‘훅’을 지르십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10,29-37)
거푸 얻어터진 율법교사는 다시 도전합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묻지요.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묻는 말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는 바로 맞받아치지 않고 비유를 들어 에둘러서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나 초주검이 돼 길거리에 버려졌다. 그런데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고, 레위인도 그 사람을 보고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여행 중인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돌보아 주었다. 그리고 이튿날 여관 주인에게 두 데나리온을 주면서 돌봐 달라고 부탁하고는 비용이 부족하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주겠다고 말했다.”(10,29-35)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신 후 율법교사에게 물으십니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누구라도 쉽게 대답할 수 있는 질문입니다.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고 대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침을 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6-38)
생각해 봅시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느냐는 율법교사의 질문에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는 예수님 말씀까지 전체적으로 하나의 틀을 이루고 있습니다. ① 생명을 얻는 방법은 -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너도 그렇게 하면 살 것이다. ②누가 내 이웃인가 -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되는 것이다→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그런데 조금만 더 깊이 살펴보면 ①과 ②의 연결에 변화가 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①의 결론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었고, 그 결론에 대한 질문은 ②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것입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에는 이웃을 사랑하려면 누가 내 이웃인지를 알아야 한다는 전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한 예수님의 강조점은 ‘누가 내 이웃인가’에 있지 않고 ‘내가 누구의 이웃이 돼 줘야 하나’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웃 사랑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에 엄청난 반전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이웃 사랑이라고 하면 내 가까이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웃 사랑의 계명을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이웃이 돼 주라’는 가르침으로 해석하십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자비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자비를 베푸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 멀리 갈 필요는 없습니다. 내 주변, 가까운 곳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또한 이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심코 지나치는 사람, 또는 외면하고 시선을 돌려 지나치는 사람이 바로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외면하지 말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또 한 가지, 예수님께서 비유의 등장 인물로 사마리아 사람과 함께 사제와 레위인을 설정한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제는 성전에서 백성을 대신해서 제사를 바치는 사람이고 레위인 역시 성전에서 봉사하는 이들입니다. 이들은 여느 사람과 달리 하느님의 집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주업으로 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강도당한 남자를 만난 것은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는 도중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예배나 기타 봉사를 마치고 내려가는 길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하다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해 주님이신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충실히 이행하고 가는 중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초주검이 된 남자를 피해 반대편으로 갑니다. 그들은 하느님 사랑의 계명에는 충실했을지 모르나 하느님 사랑과 짝을 이루는 이웃 사랑의 계명에는 불충했습니다.
이에 비해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에도 충실하지 않고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해서 유다인들이 이방인처럼 무시하고 혐오하는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강도당한 남자를 끝까지 보살펴 줍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들에게 이웃이 돼 준 것입니다. 경건한 유다인의 눈에 이 사마리아 사람은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지키지 않은 죄인으로 비칠지 모르지만 그는 이웃 사랑의 귀감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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