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든지 막히기 시작하면 신호가 온다.
처음에는 그 신호를 감지하기 쉽지 않다. 그래서 막히기 시작한 것을 모르고 그냥 놔두면 신호는 점점 뚜렷해진다. 하수구가 막히면 처음에는 물이 잘 내려가지 않는다. 그냥 놔두면 정도가 심해지고 마침내는 버린 물이 오히려 거꾸로 올라온다. 도로가 막히기 시작하면 차들이 서행한다. 그러면서 교통체증이 시작되고 체증이 길어지면 교통대란으로 이어진다. 하수가 역류하고 교통대란이 발생하면, 이미 피해가 생긴 것이다.
그러니 막힌 곳은 더 큰 피해를 보기 전에 빨리 뚫어야 한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소에 막히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하수구가 막히지 않게 하려면 음식물 찌꺼기를 잘 걸러내야 하고 자주 청소도 해야 한다. 도로도 마찬가지다. 평소 도로 정비를 철저히 하고 운전자들은 차량 안전 점검을 하고 교통 법규를 준수해야 한다.
하수구가 막히면 뚫으면 되고, 도로가 막히면 막힌 곳을 치우면 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가 막히면 어떻게 해야 할까. 막히지 않도록 하면, 곧 ‘소통’하면 된다. 이렇게 답은 쉽지만 정작 문제는 여기서부터다. 어떻게 하면 소통할 수 있을까. 소통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박근혜 대통령에게 그동안 쏟아진 비판 중 하나는 ‘불통’ 대통령이라는 것이고 그 이유는 제왕적 권위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제왕적 권위주의는 대통령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어느 조직이든, 특히 불통하는 조직에는 권위주의가 지배한다. 가정에서는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직장에서는 CEO 권위주의 혹은 상사의 권위주의가, 공무원 사회에서는 관료적 권위주의가, 교회에서는 성직자의 권위주의가 득세한다.
게다가 이런 권위주의는 갑과 을의 관계에서 늘 갑이 행사한다. 불통의 원인이 되는 권위주의에서 벗어나려면 우선 갑이 갑질을 하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갑이 갑질을 하지 않게 될까.
그리스도 신자들은 그 모범을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본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 세상에 오시어 죄로 인해 멀어졌던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인간을 화해시키셨다고 고백한다. 그래서 그분을 ‘소통자’라고 고백한다.
그분은 어떻게 해서 소통자가 되셨을까. 소통이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들음’과 ‘엶’이다. 그분이 세상에서 하신 것은 자기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분은 늘 아버지의 영께 귀를 기울이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 뜻을 고집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은 늘 아버지께 열려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그분은 아버지께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도 열려 있었다. 실상 그분이 세상에 오신 것이 바로 세상 구원을 위해서고 이를 위해 당신 자신을 내놓으셨다. 열려 있을 때만 가능하다.
오늘 우리 집안이, 우리 회사가, 우리 교회가, 우리 사회가, 우리나라가 불통으로 아파하고 있다면, 그래서 소통을 필요로 한다면, ‘들음’과 ‘엶’의 가치를 진지하게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권위주의에 매료돼 갑질을 하면 불통이 시작되고, 하늘과 사람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자신을 열면 소통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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